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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래식과 通하기

    JUNE JUNE 2010.06.19

    카테고리

    예술/문화



     

     

    클래식, 악기에 비춰보는 자아상

     

     


    몇 해 전 여름의 초입에, 나는 가까운 지인이었던 Y와 안국동과 대학로, 홍대를 하이에나처럼 쏘다니곤 했다. 그녀는 모 인디 밴드의 베이시스트에 미쳐있었는데, 그녀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소속 밴드와 이름 뿐이었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으면서도 Y는 열렬히 그를 쫓아다녔고, 집착에 가까울만큼 모든 일정을 그의 공연에 맞췄다. 어찌보면 10대 소녀가 아이돌에게 품을만한 열정인 듯 보였지만 Y는 진지했고, 또 집요했다.

     

     

    그 맹목적인 애정의 대상이 궁금해졌던 어느 날, 나는 Y를 좇아 그 작은 라이브 하우스로 향했다. 그러나 Y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던 그  베이시스트는, 훤칠하긴 했지만 언뜻 조명 사이로 보이는 생김새가 딱히 눈에 띌 정도로 잘 생기진 않았다. 그의 연주 역시, 아마추어인 내 귀에 '잘한다' 싶긴 했지만 가슴과 영혼을 울릴만한 명연주는 아니었다.

     

     

    1시간 남짓의 공연은 끝났고, 노곤해진 우리는 버드와이저를 한 병씩 쥔 채 라이브 하우스를 빠져나왔다. 나는 곧 Y에게 그토록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물었다. Y는 음악과, 맥주와, 사랑에 취한 눈을 하고서 단 한가지 대답만을 무심히 던졌다. "베이스 소리가 섹시해서."

     

     

    쿵.

     

     

    나 역시 그 어떤 정치사상보다 순수예술의 힘을 신봉하는 사람이지만, 그가 연주하는 악기를 그의 존재로 대입해가면서까지 열렬한 연애 감정을 품진 못했었다. Y에 비하면, 음악을 즐기는 데 있어 난 '생초짜'였던 것이다. 

     

     

    다만 오케스트라야말로 '다양한 캐릭터의 군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호기심 많고 긍정적인 플룻, 소박하고 따뜻하며 목가적인 소리를 내는 오보에, 용감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의리파인 트럼펫처럼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가고, 또 편애할 수 밖에 없는 소리를 내는 악기가 있다. 바이올린. 삶에 대한 비극과 희망의 아이러니로 가득한 소리를 내는, 섬세한 바이올린 말이다. 첼로가 '사색'의 소리를 낸다면, 바이올린은 '열망'의 소리를 낸다.  비극적이지만 강인한, 가냘프지만 꺾이지 않는, 상처로 너덜너덜해지더라도 그 모든 상처를 끌어안은 삶의 의지를 나타내는 소리.











    예술의 본질이 그러하듯, 음악 역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오늘날의 오토튠과 신디사이저에도 물론 그 나름의 영혼이 있겠지만, 사람의 날숨과 온 몸의 근육을 움직여야만 스스로 노래하는 악기야말로 진정한 음악의 기조라고 주장한다면 너무 고루한 취향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좋다. 느리고 불편하고 수고를 필요로 하는 아날로그 음악들이. 양산화 되지 않은 채 긴 시대를 이어가고 있는 클래식이 말이다.



    클래식이 다소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필자가 한 가지  제안을 하자면,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닮았다 느껴지는 악기를 점찍으라"는 것이다. 보다 단순하게 접근해 생김새가 예뻐서, 혹은 음색이 마음에 들어 그 악기에 빠져도 좋다. 좋아하는 악기가 없으면 클래식과 친해지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오케스트라야말로 다양한 캐릭터의 군상이므로 반드시 자신을 닮은 악기가 있을 것이다.



    하나 골랐다면, 협주곡이나 교향곡을 들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악기의 선율을 좇으면서 듣는다. 주선율을 맡고 있는 악기가 아니어도 다른 소리와 구분하기 위해 듣다 보면 좀 더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클래식의 폭은 그 어떤 음악 장르보다 깊고 다양하다.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예술을 즐기는 것에 교과서나 정석은 없다. 극히 개인의  취향에 의존하는 부분이므로 처음부터 그 방대한 역사나 양에 기가 눌릴 필요는 없다. 나 역시 어디가서 클래식 좋아한다 말하기 부끄러웠던 이유 중 하나가, 지나친 편애 때문에 아는 분야가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소나타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뭐 어때?



    그래서, 혹시나 필자와 같이 바이올린을 더 편애하는 분들을 위해 몇 가지 바이올린 소나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미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고수님들은 공감의 차원에서, 지금까지 클래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이 글에 솔깃해 한 번쯤 들어보고 싶다 하시는 분들은 오락의 차원에서, 그저 즐겨주셨으면! 어려운 부분은 전부 제끼고 그저 재미와 내 귀의 호강을 위하여! 





    1.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 Bach : Sonata for solo violin No. 1 G minor BWV 1001 (Adagio)




    18세기 초반, 바흐가 작곡한 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는 총 6개 시리즈로 구성된다 (*BWV1001~1006: 바흐의 작품 번호 앞에는 BWV라는 글자가 붙는다). 다른 악기 없이 오직 바이올린 한 대만으로 연주되는 이 소나타가 만들어진 배경으론, 바흐가 자신의 바이올린 테크닉 '연습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다.  마치 서너명이 연주하는 듯한 고난이도의 연주 스킬을 요구하는데다 바이올린 솔로곡이라 그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수많은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되고 있다. 6개 중에 가장 유명한 곡은 따로 있지만, 이 1번의 아다지오는 내게 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귀를 기울이면> 이라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매이션이 있다. 담담하면서도 메르헨틱한 서술법으로 '진로' 에 대한 이야길 소소하게 그려낸 성장 드라마다. 그리고 여기에는 바이올린 장인을 꿈꾸는 중학생 소년이 등장한다.
     


    내가 이 애니매이션을 처음 본 시점이 마침 중학교 2학년 무렵인지라, 또래인 그들에게 여러모로 감정이입을 하면서 봤던 기억이 있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소녀는 우연히 보게 된 소년의 바이올린 만드는 모습에 감탄하며 딱 한 곡만 연주해달라고 부탁한다. 소년은 쑥쓰러워하며 거절하지만, 간곡히 부탁하는 소녀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바이올린을 집어 든다. 그리곤, 음색을 조율하기 위해 한 5초쯤 간단히 연주하는 곡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BWV1001 아다지오였다.



    짧지만 강렬했던 그 순간이, 약 십여년이 지나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소년이 연주했던 그 5초의 짧은 순간이, 나의 1번 바이올린 소나타가 된 셈이다.



    그리고 이 애니매이션의 영향으로 나는 너무너무 바이올린이 배우고 싶어졌다! 비록 그 꿈을 이룬 것은 20대가 되어서지만 말이다. 나의 수많은 드림 리스트 중에는, 이 BWV1001 아다지오를 멋드러지게 연주해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하하.





     

    2. 엘가의 바이올린 소나타 - Elgar : Violin Sonata in E minor Op.82




    어느날 7공주 꼬마들이 등장해 "흰 눈이 내려오는 날~" 하며 노래하던, 그 곡의 원곡이 바로 엘가의 '사랑의 인사' 다. 또 다양하게 여기저기서 리메이크 되고 있는 '위풍당당 행진곡' 역시 엘가의 대표곡이다. 이처럼 애드워드 엘가는 영국을 대표하는 19세기 작곡가다.  전형적인 영국 신사,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 아내를 사랑하는 애처가. 그래서 그는 그 다운, 영국 다운 교향곡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인생의 말년에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하고 조국은 전쟁에 빠져있을 때) 삶의 끝자락에서 만들어진 곡들은 기존의 엘가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이 비극으로 가득 찬 바이올린 소나타 82번이다 (*Op는 Opus의 약자로 작곡가의 작품 번호를 의미한다. 바흐나, 모차르트의 곡들은 후대에 작품 번호가 정리되면서 새롭게 표기되기도 했다).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절절함이 도입부부터 마무리까지 내내 이어진다.



    특히 오금이 저릴 만큼 심장을 꽉 쥐어짜는 듯한 곡의 절정에서는 마치 비극을 통째로 삼킨 것 마냥 목 언저리가, 가슴께가, 저릿저릿하게 아려온다. 곡을 끝까지 듣고 나면 나도 모르게 가쁜 숨을 고르느라 깊은 숨을 들이쉬게 되고만다. 이 곡이야말로 나에게는 '엘가의 재발견' 이 되었던 셈이다. 그동안 애국의 뉘앙스로 가득한 그의 교향곡들 때문에 엘가를 다소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사람이라며 평가절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에 대해 앞서 말했던, "비극적이지만 강인한, 가냘프지만 꺾이지 않는, 상처로 너덜너덜해지더라도 그 모든 상처를 끌어안은 삶의 의지를 나타내는 소리" 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3.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 Beethoven : Violin Sonata No.9 in A major 'Kreutzer'




    너무 유명한 곡은 소개를 안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크로이처' 혹은 '크로이체르' 로 불리고 있는 베토벤의 9번 소나타는, 그가 쓴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곡으로 이름 높기 때문이다. 제 5번 '봄' 과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바이올린 소나타인 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는 다양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원래 이 곡은 베토벤과 깊은 우정을 나누던 그의 친구 브리지타워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으나, 베토벤과 브리지타워가 한 여자를 두고 반목하게 되면서 무산되고 만다. 그러자 베토벤은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크로이체르에게 이 곡을 헌정한다. 크로이체르의 유려한 연주를 높이 샀던 것이 그 이유였으리라 짐작되지만, 그에게 헌정됐던 이 소나타가 그를 통해 연주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크로이체르는 베토벤과 친하기는 커녕 베토벤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로이체르는 이 소나타를 '난폭하고 무식한 곡' 이라며 비아냥거리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랬던 베토벤의 이 9번 소나타가 '크로이체르' 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것은 아이러닉한 유머가 아닐 수 없다.  



    이 곡은 '바이올린' 과 '피아노' 의 격정적인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서로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을 부딪쳐 상대방의 틈을 파고들기도 하고, 잡아 끌거나 밀어내기도 한다. 대등한 두 사람의 맞대결을 보는 듯한 흥미진진한 이 곡의 진행은, 한 악기가 다른 악기의 반주나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듀오 소나타' 로서 더 각광받아 왔다.



    그리고 이 곡에 영감을 받아 쓰여진 소설,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 소설이 처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들어올 때 제목은 '결혼' 이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란 제목이 독자에게 생소할 것이란 출판사의 오만한 판단으로 작명되었을 것이다.  아내를 죽인 남자의 고백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베토벤의 9번 소나타를 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자신의 아내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와 이 곡을 연주하며 사랑에 빠졌고,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칼로 찔러 죽이고야마는 소설 속의 이 남자는 이 곡이야말로 '끔찍한 소나타'라며 절규한다. 불륜을 상징하는 음악이든, 사랑을 부추기는 음악이든, 톨스토이에게 있어서 이 곡은 남다른 의미였던 것이 분명하다.     






    클래식을 '공부하며 듣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악보와 구성의 의미를 알고나면 '들리는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게 되겠지만, 그건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예술이란 실을 뽑아 낸 인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열정과 감성으로 지어진 옷을 입는 것이다. 실의 원료, 재질, 무게와 두께를 알아야 옷을 잘 입는 것이 아니듯, 형식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악보에 쉼표가 쓰인 것은, 작은 트레몰로가 있는 것은, 엇박자로 음이 시작되는 것은, 모두 작곡가의 의도 아래 짜여진 암호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악보는 한 사람의 자아가 고스란히 녹아든 '글자 없는 자서전'이다. 그 때문인지 작곡가의 생애와 곡이 쓰여진 배경을 알고 음악을 들으면, 마치 그 시대 그 어딘가의 언저리에서 나 역시 존재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몇 백년 전에 누군가가 만들고, 누군가가 연주하고, 누군가가 감동했던 음악을 지금의 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몇 십년 몇 백년이 흐른 뒤엔 또 다른 누군가가 이 곡을 감동하며 듣고 있을 것이다. 베토벤은, 모짜르트는, 위대한 모든 작곡가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다. 연주하는 누군가의 손 끝에 의해 말이다.

    JUNE

    여행하고 글 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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