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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숲 속에 답이 있었다, 핀란드 헤멘린나

    moo nee moo nee 2014.08.21

    카테고리

    북유럽, 휴양, 풍경

     

    숲 속에 답이 있었다

    핀란드 헤멘린나(Hämeenlinna)

     

     

    IMG_6002-PANO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인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집착 증세를 보인 도시는 핀란드의 헤멘린나(Hämeenlinna)였다.
    가장 좋은 날씨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여행의 감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헤멘린나로 가고 싶었다.

    “헤멘린나에는 아름다운 호숫가 성과 시벨리우스의 생가가 있지만, 아마 다자키 씨한테는 그보다 더 중요한 볼일이 있을테죠.”
    -p.303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作 | 민음사)

    그리곤 날씨와 감성의 조건이 충족한 바로 그날.
    배탈이 났다.
    그것도 최근 겪은 배탈 중 가장 극심한 복통으로, 오장육부가 뒤엉키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행지에서는 늘 생수를 사 먹곤 했는데, 사우나 중 수분 보충을 위해 사둔 생수가 부족하여 (먹어도 괜찮다고 하는 핀란드의)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신 탓이었다. 지난 며칠간 먹은 모든 것을 쏟아냈다.

     

     

    헤멘린나 호수

     

    헬싱키에서 헤멘린나로 향하는 오전 10시 6분 기차를 거의 기어서 5분에 탔고, 7번 칸 자리였는데 기어갈 힘조차 없어서 식당칸에서 엎어져 있다가 화장실에서만 거의 40분을 보냈다. (이럴 거면 화장실 석을 예약할 것을 그랬다.) 헤멘린나는 헬싱키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으로 기차로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동행한 친구는 계속해서 중간에 내려 헬싱키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당시는 헤멘린나를 꼭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중간역에서 내려 걸어서 반대편 열차를 타러 갈 기운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냥 엎어져 있었다.

     

     

    헤멘린나 약국

    ▲ 나를 구원해준, 헤멘린나의 약국(Apteekki)

     

    그렇게 겨우겨우 도착해서 헤메린나에서 처음 찾아간 곳은 하루키 소설 속 숲도, 호수도 아닌 바로 약국이었다.
    약을 먹고 걷다가 지치면 쉬어가며 하루를 보냈다.
    덕분에 느릿느릿 헤멘린나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주인공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여름, 가장 친했던 친구 5명의 그룹으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퇴출당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십여 년 후 퇴출의 이유를 밝혀나가는, 즉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순례의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일본의 나고야, 하마마쓰, 도쿄, 그리고 핀란드의 헬싱키, 최종적으로 헤멘린나까지… 각 도시가 매우 인상 깊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과 함께 순례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5개 도시 중 일본에 있는 나고야, 하마마쓰, 도쿄를 작년에 순방할 기회가 있었다. 순례의 마지막 친구 구로를 만나는 헤멘린나를 못 가본 것이 마치 홀로 색채가 없었던 (이름에 색깔를 의미하는 한자가 없었던) 다자키 쓰쿠루의 심리 마냥 아쉬웠다. 이번 여름에 그 아쉬움을 해소할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헤메성

    ▲ 헤매성(Häme Castle)

     

    헤멘린나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명소는 헤메성. 13세기 스웨덴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하는 이 성은 일본의 성과 닮은 느낌이 들어 친근했다. 붉은 벽돌의 성이 초록 잔디와, 파란 하늘, 투명한 호수와 어울려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성의 꽤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어, 호반 도시다운 헤멘린나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INFORMATION

    헤메성(Häme Castle)

    개관시간:  1월 2일 ~ 4월 30일 / 8월 15일 ~ 12월 15일 : 화~금 10:00-16:00, 주말 11:00-16:00, 월요일 휴무
    5월 2일 ~ 5월 31일 : 월~금 10:00-16:00, 주말 11:00-16:00
    6월 1일 ~ 8월 14일 : 매일 10:00-17:00
    입장료: 성인 8유로, 학생 6유로, 어린이 4유로
    (헤메성, 군사박물관, 역사박물관, 감옥박물관 공통 티켓을 구매할 경우, 성인 12유로, 어린이 6유로)
    홈페이지: http://www.nba.fi/en/museums/hame_castle

     

     

    헤메성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카모메식당’에 이런 장면이 있다. 오랫동안 부모님 간병으로 시간을 보낸 마사코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겨우 자유가 생겨 헬싱키에 오게 된다. 카모메식당에서 마사코는 “왜 핀란드인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일까요?”라는 질문을 하는데, 핀란드 청년 토미가 답한다.

    “핀란드에는 숲이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바로 숲으로 향한 마사코처럼, 나도 핀란드의 숲에 꼭 가보고 싶었다.

     

     

    아울란코

     

    자작나무 가지 사이로 호수가 보였다. 작은 방파제 같은 게 있고, 겨자색 플라스틱 보트가 한 대 묶여 있었다. 낚시용 작은 보트였다. 나무들에 둘러싸인 아담한 목조 오두막이 있고, 지붕에는 사각형 벽돌 굴뚝이 솟아올랐다.
    -p. 318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作 | 민음사)

    소설 속에서 구로가 가족과 휴가를 보내는 헤멘린나 근교에 있는 숲. 아마 아울란코 부근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이탈라 글라스 센터에서 쇼핑을 하고 싶다는 친구를 보내고, 혼자 아울란코행 버스를 탔다. (2,13,17번 버스를 타고 약 20분 소요. 정류장은 장거리 버스터미널 바로 앞.)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는 아울란코는 핀란드 사람들이 여름 피크닉으로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내가 간 날에는 사람이 없어서 무서웠다. (나는 굉장한 겁쟁이다.)

     

     

    아울란코 입구

    ▲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 Granite Castle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이대로 가야 할지, 그냥 돌아갈지.

    마침 한 핀란드 가족이 숲에서 튀어나와, 그들에게 의지하면서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들이 시야에서 멀어지면, 조금 더 걷다 만나는 다른 가족들에게 의지하고,
    또다시 의지하면서, 의지의 대상을 배턴터치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울란코 호수

    ▲ 아울란코의 숲

     

    프란츠 리스트가 여행의 기억을 곡으로 풀어낸 작품집 '순례의 해' 중 '르 말 뒤 페이.'
    다자키 쓰쿠루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곤, 만남의 마지막 즈음에 자살한 시로가 즐겨 연주하던 ‘르 말 뒤 페이를 기억하는지’ 묻는다. 르 말 뒤 페이란, 우리말로 '향수' 혹은 '멜랑콜리'로 번역되곤 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르 말 뒤 페이」. 조용한 멜랑콜리가 어린 그 곡은 그의 마음을 감싼 형체 없는 슬픔에 조금씩 윤곽을 그려 준다. 마치 허공에 잠겨 든 투명한 생명체의 표면에 수없이 많은 가느다란 꽃가루가 달라붙어 전체 형상을 눈앞에 조용히 떠오르게 하는 것처럼..
    -p.289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作 | 민음사)

    내가 걸은 아울란코의 숲이 ‘르 말 뒤 페이’의 의미를 충분히 품고 있는 듯 했다.
    혼자 걷고 있는 나는 울컥 했다.

     

     

    호숫가 백조

     

    신경 써야 하는 사람도 없고, 여비가 부족하지도 않았고, 속이 조금 불편했지만 꽤 걸을 수 있는 체력까지 있었다. 백조와 새끼들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붉은 얼굴을 한 핀란드 가족들은 그들이 지나가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뒤로는 호수가 반짝거리고 있었고, 숲이 울창했다. 그곳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감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영문도 모르게 슬펐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1.8km 정도 걸어가면 숲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타워(Aulangon näkötorni)가 하나 있다고 해서, 계속 걸어가 보았다. 3km는 걸은 듯했지만 타워는커녕, 나무들 때문에 높은 건축물이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둘째라면 서러울 방향치인 나는 숲 안에서 같은 장소로 서너 번가량 돌아왔다.

    정말 다리가 끊어질 것 같던 순간.
    ‘진짜 돌아가자!’ 마음먹었는데,
    그럴 때는 늘 친절한, 용기를 주는 아주머니가 등장한다.

    손짓으로 타워를 만드니,
    “노! 잉글리쉬! &^%$#@”
    핀란드어로 ‘얼마 안 남았으니 앞으로 가’라고 한다.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알아 들어 다리를 질질 끄니 타워가 보였다.

     

     

    아울란코 타워

     

    타워 바로 밑에는 매점이 하나 있었다. 오전에 모든 것을 쏟아내곤 배 안에는 아무것도 넣질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왜 콜라가 마시고 싶은지…

    매점에서 콜라를 한 병 샀다.
    (사실 타워를 오를 기운이 전혀 없었다.)

    콜라를 마시고 앉아 있었다.
    (나는 평소에 콜라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

    딱 콜라 한 잔 마셨는데!
    (아마 15분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파란 하늘이었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무서운 속도로 몰려든다.
    켜켜이 쌓여 회색,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타워에 오르니, 검은 숲이 되어있다.
    하아.

    이번 여행 열흘 동안 단 한순간도 날씨가 흐린 적이 없었다. 계속되는 맑은 날씨, 푸른 하늘, 눈부신 풍경에, 너무 운이 좋은 것 같아 무서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순간들이 계속되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매몰차게 몰려든 구름.

     

     

    아울란코 전경

     

    콜라 한 잔으로 푸른 하늘 아래 싱그러운 초록빛 숲 전경을 놓치고 말았다.
    땅바닥에 앉아서 엉엉 울고 싶어졌다.

    '뭐 그런 거지.'
    쿨한척하고 싶었지만, 혹시 구름이 없어지지는 않을까 20분 동안 그 높은 곳에 마냥 서 있었다.

    포기하고 내려와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밤 11시 반까지도 환한 백야의 핀란드이지만, 구름이 끼니 숲은 무서웠다.

    의지했던 가족들도 다들 어디로 들어갔는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백조 가족들이 있어서 이들에게 무한정 의지했다.

     

     

    헤멘린나

     

    그리곤 버스 시간을 잘 못 보아 물가 비싼 나라에서 택시를 타게 된, 비교적 귀여운(?) 에피소드로 일정을 마감하며 생각했다.

    헤멘린나행.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IMG_6312

    ▲ 헬싱키로 돌아가는 길, 창밖 풍경 역시 하루키의 소설 그대로였다.

     

    도로 양쪽은 거의 숲이었다. 국토 전체가 싱싱하고 풍성한 녹음으로 덮인 듯한 인상이었다. 대부분 자작나무고 소나무나 가문비나무나 단풍나무가 섞였다.
    -p. 31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作 | 민음사)

     

     

     

    moo nee

    배경여행가. 책, 영화,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의 모습이 지워진 배경에 들어가 보는 여행을 하고 있다. 백과사전 회사에서 5년 가까이 근무. 건조하고 차가운 글을 쓰고 편집하는 일을 업(業)으로 삼으니, 촉촉하고 다정한 글을 찾고 쓰는 일이 낙(樂)이 되었다. 지금은 IT회사에 재직 중. 저서로는 <다정한 여행의 배경>이 있다. www.istandby4u2.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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