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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이 스토리 3 - 당신의 동심은 안녕하십니까?

    발없는새 발없는새 201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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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미국



    지금껏 영화를 보면서 딱 한번 경이로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다. 30년이 넘는 인생에서 족히 수천 편의 영화를 봤지만, 그건 단순히 존경과 찬사의 차원을 넘어 도저히 제 머리와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그 영예(?)의 주인공은 2003년 겨울의 극장가를 온기로 채워준 <러브 액츄얼리>입니다.


    개봉 당시 여자친구가 있었음에도 언제나처럼 혼자서 <러브 액츄얼리>를 봤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결코 말과 글로 형언할 수 없는 환희로 벅차올라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굳이 짧은 단어로 그때의 느낌을 표현하라면, 그건 감동의 향연이었고 행복이었습니다. "나는 행복하다"는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전 인류의 궁긍적인 삶의 목표가 영화 한 편으로 얻어질 수 있었으니 이 어찌 경이의 대상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환희가 잠시 후에는 깊은 의문으로 바뀌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이 의문을 풀어줄 수 있을 만한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감독이든 시나리오 작가든 간에 필시 <러브 액츄얼리>를 제작한 사람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는 관객들을 행복에 젖게 만드는 영화를 절대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러브 액츄얼리>만큼은 아니지만 픽사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보면서도 비슷한 의문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픽사는 디즈니로 대표되던 뻔하디 뻔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라면 질색하던 저를 다시 극장으로 갈 수 밖에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특히 디즈니와는 달리 원작에 기대지 않고 매번 독창적인 캐릭터와 현대적인 감각에 맞춘 이야기를 선사하는 그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이러한 픽사의 작품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토이 스토리>를 비롯한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는 <러브 액츄얼리>의 경우와 같은 어떤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 아닌 부러움 섞인 찬사를 보내게 됐습니다. 분명 픽사가 선보인 일련의 작품들은 모두 성인의 손길을 거쳐 나온 것일 텐데 어째서 이토록 동심을 자극할 수 있는, 그것도 저연령층만이 아닌 성인층까지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놀라웠습니다. 이를테면 - 비록 제가 그닥 좋아하는 분은 아니지만 - 환갑이 넘은 연세에도 여전히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하시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보면서 느끼는 바와 동일합니다. 이런 건 절대 훈련이나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물론 창의력이야 연습을 통해서 키울 수 있다 치더라도 동심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은 그렇게 쉽게 배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더 진화하고 성장하듯이 정신은 점점 더 속세에 찌들어 타락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러브 액츄얼리>의 제작진에 대해 내렸던 결론처럼 픽사의 직원들도 그들의 삶 자체에 동심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임이 틀림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 이런 작품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제 얘기를 잠시 하자면 - 이 글을 읽으실 분들께서는 비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 - 가끔 슬픈 영화를 볼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저 자신을 발견하면 덜컥 불안해지곤 합니다. 지금까지의 기억에 근거해서 예전이라면 분명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도 남을 장면이라는 것을 머리로 판단했지만 가슴에서는 그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감성의 혼돈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건 제게 어떤 영화를 머리로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데 실패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에 짓눌린 채로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왜 이러지? 왜 울지 않는 거야? 왜 가슴이 아리지 않는 거야?"


    믿지 못하시겠지만 심지어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려보자며 노력을 해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지 이해하시겠나요? 저는 머리가 붕어의 아이큐에 비견될 정도로 바보가 되는 것보다 가슴이 시베리아 벌판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게 더 두렵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이성의 유무라고 배웠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불완전한 감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여타의 제다이와는 달리 너무나도 인간적이었기에 다스 베이더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스타워즈>의 아나킨 스카이워커처럼, 악행을 일삼는 자로 인도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을 온기로 채워줄 수 있는 것 또한 이성이 아닌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이나 이성으로 점철된 부류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저는 이성과 감정이 적절히 배합된 존재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성은 불완전한 감정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지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 그 존재목적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슬픈 영화를 볼 때와는 달리 픽사의 작품을 보면서는 깨끗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간혹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도 있지만 얼마 후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눈물에 콧물까지 질질 흘리는 걸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아직 내 감성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하지만 픽사의 작품을 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체념하고 지금 그대로의 저 자신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제게는 저들과 같은 동심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저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픽사에서 만든 작품들을 보며 공감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감동에 젖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나마 아직까진 이런 감정이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픽사의 작품은 제게 있어 최소한의 보루입니다. 비록 깃털처럼 가볍운 무게에 불과하더라도 여전히 내게 동심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보루...


    픽사의 직원들은 피터 팬이 될 수는 없지만 피터 팬을 동경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이들이 일반적인 사회 혹은 견고한 패러다임에 갇힌 무리들 속에 내던져졌더라면 결코 지금의 픽사와 같은 '꿈의 공장'이 생겨날 수 없었을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고 획일화를 강조하기 일쑤인 사회라면 그들을 피터팬 신드롬 환자에 불과한 존재로 배척하기 십상이었겠죠. 이것은 결국 지금의 한국 사회가 얼른 동심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는 의미에 다름아닙니다. 우리들은 어서 어른이 되어서 기성세대가 갖춰놓은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라며 재촉하기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일탈로 간주합니다. 한국 사회가 달리 보수주의 일색이 아니죠.





    <토이 스토리 3>는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나오기 힘든 작품일 겁니다. 2편이 나온 후 11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이 흘렀건만 <토이 스토리 3>에 녹아든 픽사의 동심과 이 동심을 기반으로 한 상상력 및 창의력은 여전히 대단합니다. 아니 이 정도라면 위대하다는 표현도 아깝지 않습니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말을 가볍게 비웃는 이들은 정말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것일까요?


    11년이 흐른 후에 제작된 <토이 스토리 3>의 캐릭터 앤디는 관객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아니 관객들이 <토이 스토리>와 함께 성장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앤디는 이제 장난감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법한 나이가 됐고, <토이 스토리 2>를 관람했던 어린이 관객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설정이라면 감정이입이 자연스레 극대화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토이 스토리 3>의 성패는 이미 여기서 갈렸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관객과 함께 성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스란히 관객의 시점에서 제작된 작품이니 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여기에 장르영화의 요소를 혼합한 솜씨도 기가 막힙니다. (이것이 성인관객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비결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우디와 버즈를 비롯한 장난감들로 오프닝을 시대적 배경이 불분명한 SF 웨스턴으로 만들더니 나중에는 이들을 탈옥영화의 주인공으로 옮겨버립니다. 특히 오프닝은 픽사의 동심을 기반으로 한 창의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목입니다. 픽사는 사실 그저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머리 속에서 과장시키고 포장했던 어린이들의 상상력의 세계를 완벽하게 화면으로 구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게 너네들이 항상 머리 속으로 그렸던 거지?" 만약 <토이 스토리>의 앤디가 현실에 있었다면 "맞아요! 바로 이거에요!"라며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 분명합니다.





    할리우드의 전형인 선악구도가 비교적 뚜렷하게 표출된다는 것은 못내 아쉽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것이 바로 픽사의 작품과 디즈니의 틀에 박힌 그것을 차별화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마냥 착해빠지고 모범적인 세계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픽사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탁아소에서 독재자로 군림하던 인형 롯소의 불변하는 캐릭터를 보면 픽사는 - 좀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 그 현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토이 스토리 3>와 같은 작품을 만드는 데 매진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앤디는 결국 예정된 수순대로 장난감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와 달리 자신의 유년시절을 함께 보냈던 장난감들에게 고마워했고 그 시간들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 채 성인이 되는 길목으로 한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비단 <토이 스토리 3>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은 한때 우리가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대거 상실한 동심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린시절에 장난감과 함께 놀면서 커왔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장난감을 멀리하게 됐습니다. 그만큼 동심도 점차 잦아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각자만의 장난감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CD와 DVD가 그것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향수와 화장품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소유욕이 작용한다는 점마저도 장난감을 향한 아이들의 반응과 일맥상통합니다. (어쩌면 동심은 기본적으로 소유욕을 동반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고가인 장난감을 선호한다는 것인데, 이걸 보면 역시 시대가 변하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물질적인 욕구가 비대해짐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점차 순수한 의미에서의 소유욕이 타인을 의식하는 과시욕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죠.



     



    각설하고, 제가 약속시각에 쫓기는 바람에 마무리가 어째 영 이상해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이만 글을 끝맺어야겠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토이 스토리 3>를 보고 난 후에 여러분은 어린 시절에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었는지 한번 떠올려보셨나요? 기억은 나시던가요? 만약 그 장난감들이 기억나신다면 적어도 저보다는 더 기억력이 좋으신 분인가 봅니다. 아니면 저보다는 조금 더 많은 동심을 간직하고 계신 것일 수도 있겠군요. 뭐 참으로 속상하고 받아들이기 싫지만 저도 인정합니다.


    제가 더 이상 그리 순수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발없는새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고 여행을 꿈꾸는 어느 블로거의 세계입니다.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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