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1909). 안중근은 자신의 행위를 한국의 독립 주권을 침탈하고 동양 평화를 교란시킨 자를 처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일어난 ‘안중근 장군(의사) 이토히로부미 저격 사건’ 은 우리가 타국의 낯선 도시 ‘하얼빈’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다. 주권을 빼앗긴 망국의 국민으로 일평생 오로지 대한독립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독립투사 안중근, 그의 마지막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간다하니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하얼빈역 안중근의사 기념관 내부 안중근의사 흉상, 중국 ⓒ 엄용선
하얼빈역 안중근의사 기념관 내부 안중근의사 유필 전시, 중국 ⓒ 엄용선
기념관에는 안중근의사의 단지된 손을 형상화한 브론즈 조각상 ‘거룩한 손’을 비롯하여 그 손도장이 찍힌 유필 등, 안중군 의사의 탄생부터 순국까지의 일평생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안중근의사가 역사적 의거를 기획하고 달성하기까지 하얼빈에 머물었던 11일간의 기록들이 상세한데 영웅적 드라마를 넘어선 한 인간의 고뇌 앞에 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이 든다.
107년 전 당시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약한 나라나 민족을 정벌하여 식민지로 삼는 침략주의적 국가 정책인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당연시되던 시절, 시대의 소용돌이에서 ‘조선’은 어쩔 수 없는 ‘약한 나라’였다.
하얼빈역 1번 플랫폼 바닥에는 그 당시 상황을 기념하는 두개의 원형 모형이 새겨져 있다. 왼편이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지점, 오른편이 이토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해 쓰러진 지점이다. 기차표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기에 바닥의 새김을 피부로 직접 만져 볼 순 없었지만 기념관 내부 통유리를 통해 멀리서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울림이 덜하진 않다.
안중근의사가 동지들과 함께 남긴 ‘장부가’ ⓒ 엄용선
안중근의사는 거사를 결심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하얼빈에 도착한 날부터 거사 당일까지 닷새가량 하얼빈시 도리구 삼림가 34호에 위치한 김성백이라는 동포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곳에서 동지들(유동하, 우덕순, 조도선의사)과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논의하고 묵묵히 그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내의 맘이 어땠을까? 안의사가 동지들과 함께 남긴 ‘장부가’라는 노래 글을 통해 그의 마음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강이 해방 후인 1954년 3월 26일 안의사 순국 44주년 추념식에서 낭독한 애도사 ⓒ 엄용선
안중근의사는 거사 계획을 세우고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 대동공보 주필 이강에게 쓴 편지에서 안의사는 자신이 김성백에게 빌린 돈을 직접 갚을 수 없음을 알고 대신 갚아주길 간곡히 당부하였는데,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부탁치곤 너무나 일상적이라 그 덤덤함에 오히려 가슴이 ‘울컥’ 매여 왔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에 책임을 지고 국민이 된 의무를 다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은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임으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하여 동양의 평화를 도모하라.”
안중근의사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간절히 품은 염원, ‘동양평화’, 그 뜻을 받들어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스스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는 방관도 죄는 죄이니 이제부터라도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말아야 할 것이다. 이번 하얼빈 여행이 유독 의미 있었던 건 이곳이 우리의 아픈 과거, 그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 취재: Get About 트래블웹진
용의 머리가 되고 싶은 뱀의 꼬리로 ‘잡다함’이 지나쳐 자칫 ‘너저분함’으로 치닫는다. 미대를 졸업해 그림을 그리며 교양 있게 살줄 알았는데 생뚱맞게 연극과 영화미술에 빠진 탓에 한 몇 년을 작살나게 고생만 했다. 그러다 운 좋게 환경디자인 회사에 취직을 하지만 그저 좀 ‘무료’하단 이유로 지복을 날로 차고, 지금까지 몇 년 째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며 되도 않는 글들을 끼적이고 있다. 밥먹고 사는 일은 자유로운 기고로 이어진다. 문화 예술 칼럼을 비롯해 다양한 취재 원고를 소화하고 있다. 한 번의 긴 여행과 몇 번의 짧은 여행을 무한 반복 중이다. 덕분에 적당히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견문은 넓혀진 것도 또 아닌 것도 같다. 쉽게 마음이 동하는 갈대 같은 호기심에 뿌리 깊은 나태함이 더해져 도대체가 갈피를 못 잡는다. 여행과 생각, 사람과 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blog.naver.com/waste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