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이스터섬은 남미에서도 좀처럼 가기 어려운 미지의 섬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스터섬을 가리켜 '세상의 끝'이라는 표현도 한다. 이스터섬을 처음 발견한 유럽의 탐험가들은 당시 부활절이었기에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은 라파 누이(Rapa Nui)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이스터섬 마타베리 공항까지는 약 5시간 15분이 걸렸다. 매일 아침 산티아고와 이스터섬 항가로아 마타베리 공항 사이는 란항공이 운항한다. 미리 마중 나온 공항 픽업 직원이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호텔에 짐을 풀고 한숨 돌리니 오후 3시가 지나간다. 이스터섬은 산티아고보다 2시간 더 느리다.
일단 이스터섬의 핵심 도시, 항가로아 주변을 산책해본다. 지리도 익힐 겸 카메라만 둘러메고 느긋느긋 걷는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치안 걱정은 접어둬도 좋다. 이스터섬은 매우 안전하니까. 매우 작은 항가로아 마을은 금세 둘러본다. 마을에 여행안내소가 하나, ATM이 둘, 그리고 레스토랑과 호텔, 렌터카 사무소 등이 중구 난방하게 흩어져 있다. 이스터섬에 도착하기 전, 산티아고에서 충분히 칠레 페소 화폐를 바꿔오는 것을 추천한다. 신용카드를 쓸 수 없는 곳이 상당히 많다. 당장 공항에 도착해서 유적지 통합입장권부터 현금 결제다. 만약 현금이 없어 공항에서 이것을 구매하지 못했다면, 마을 외곽 여행안내소까지 접근해서 티켓을 사야 하는데, 매우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운전 감각과 주변 지리를 익힐 겸 항가로아 마을을 두세 차례 돌아본다. 일단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아후 타하이(Ahu Tahai) 유적을 찾았다. 서쪽 끝에 자리하기에 자연히 일몰 명소가 되었다. 매일 일몰 무렵이면, 이스터섬을 찾은 여행자 대부분이 이곳으로 찾아온다. 이후 지도를 보고 남쪽 해안도로로 향하기 시작했다. 동쪽 끝에 자리한 아후 통가리키(Ahu Tongariki)까지 약 40분을 달려볼 생각이다. 날이 어둑해서 사진이 걱정되지만, 일단 가볼 생각이다. 이스터섬은 교통량이 적어 운전 환경은 좋다. 하지만 늘 돌발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도로에서 야생동물도 곧잘 도로로 뛰어들고 패인 곳도 많기 때문. 여기에 폭풍우가 찾아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소나기가 내린다. 늘 방어운전은 기본이다.
아후 통가리키에 도착했다. 아후 통가리키는 이스터섬의 핵심 명소로 거대 모아이 석상 15개가 일렬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 곳. 1960년대 이스터섬을 강타한 대지진 때문에 통가리키 해변에 8m 이상의 쓰나미가 덮쳤고, 당시 이곳의 모아이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1990년대 초반,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중구 난방하게 쓰러져있던 모아이들을 세워 현재와 같이 복원했다. 인근에 있는 모아이 채석장, 라노 라라쿠(Rano Rarkku)를 찾았을 때 어마어마한 폭우가 찾아왔다. 약 1시간을 차에서 기다려봤지만, 비는 좀처럼 그칠 생각이 없다. 별수 없이 다시 반대편 항가로아로 차를 돌린다. 오늘 관광은 아무래도 물 건너간 듯하다.
어제 온종일 흐리고 폭우가 내리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화창하다. 거짓말처럼 하늘엔 새하얀 뭉게구름이 떠다닌다. 아침 일찍 찾은 곳은 항가로아 마을 남쪽에 자리한 오롱고(Oronge). 이곳 역시 이스터섬 관광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멋진 경관을 자랑한다. 푸른 하늘과 사파이어 빛의 남태평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어 보는 내내 감동의 연속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거대한 분화구 라노 카우(Rano Kau)와의 만남이다. 이스터섬에서 가장 큰 분화구로 서태지도 이곳을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곳이다. 거대한 분화구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남태평양. 오늘도 대자연 앞에 겸손을 배운다. 오롱고 유적에 입장하지 않고도 라노 카우 분화구는 볼 수 있으니 참고할 것. 렌터카를 갓길에 대고 잠시 접근해 사진을 찍고 빠지면 된다.
다시 어제 달렸던 해안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향한다. 중간에 만난 아후 아카항가(Ahu Akahanga)는 바다를 향해 쓰러진 모아이들로 유명한 유적지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모아이 석상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얼굴을 땅으로 향하게 한 것이 특징. 이는 오래전 ‘프리모아이’라고 불리는 모아이 쓰러트리기 전쟁의 결과다. 유적지지만, 주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더욱 인기 있는데, 남태평양과 해안침식 절벽의 멋진 경치는 발길을 오랫동안 붙들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폭우로 어제 가지 못했던 라노 라라쿠. ‘모아이 채석장’이라는 말로 더 유명하며 이스터섬에서 모아이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옛날 이곳에서 거대 석상이 만들어졌는데, 만들어진 이유는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누가, 언제, 왜 모아이를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 따라서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도 폭풍우와 흉년을 막고자 세웠다는 설이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다. 날이 매우 화창해서 그런지 발걸음 또한 가볍다.
인증 사진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고프로를 다시 꺼낸다. 삐딱하게 서 있는 모아이 둘을 배경으로 멋진 기념사진을 남긴다. 채석장 반대편에 자리한 분화구도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다. 이후 어제 찾은 아후 통가리키를 다시 찾았다. 확실히 날이 맑으니 어제와는 상반된 분위기다. 아후 통가리키 유적은 거대 모아이 15개가 일렬로 서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오래전 대지진 이후 일본인 과학자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한 유적이다. 칠레 정부는 고마움을 표하면서 일본에 모아이 일부를 기증했다. 동쪽에 자리하고 있기에 이스터섬 일출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일출을 보려면, 항가로아 마을에서 새벽에 출발해야 한다. 또한, 렌터카 새벽 운전은 주의해야 한다.
다음 날도 날씨가 좋았다.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이스터섬 북부에 있는 아나케나 해변(Anakena Beach)로 향한다. 아나케나 해변은 이스터섬의 유일한 해수욕장. 비키니를 입은 미녀들이 태닝하는 장면과 아이들이 수영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다. 해변 입구에는 7개의 모아이가 일렬로 서 있고, 그 뒤로 하나의 모아이가 홀로 서 있다. 바로 이 모아이가 이스터섬에서 제일 먼저 발견된 아후 아트루 후키(Ahu Ature Huki)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아나케나 해변에 도착하면, 일단 모아이 사진을 찍고 이동한다. 이곳에서 수영하고 싶다면, 미리 수영복을 입은 뒤, 겉옷을 걸치고 오는 것을 추천한다. 마땅한 탈의실이 없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약 2시간을 보낸 뒤, 다시 항가로아 마을 쪽으로 차를 돌린다. 마을로 돌아오기 전, 중간에 들른 곳은 7개의 모아이 석상이 나란히 서 있는 아후 아키비(Ahu Akivi)를 찾았다. 이스터섬의 다른 모아이들은 모두 바다를 등졌는데, 이곳의 모아이들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원주민들에 따르면, 저 모아이들은 이스터섬을 지키는 7인의 왕자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이스터섬을 지키는 7인의 수호신이다. 여기서 약 2시간을 오르면 테라바카(Terevaka) 화산 정상에 닿을 수 있다. 테라바카 화산은 이스터섬에서 제일 높은 곳. 트래킹을 원한다면 약 3시간 정도 투자해보자. 멋진 전망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날씨가 또 심상치 않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한다. 일행이 없으니 포기도 빠르다. 지체 없이 다시 차에 올라탄다.
이스터섬 정보
위치 칠레에서 서쪽, 비행기로 약 5시간 15분을 날아야 만날 수 있는 미지의 섬.
거리 칠레 본토에서 서쪽으로 약 3500km
추천하는 이유 배낭여행자가 동경하는 지상 최후의 엘도라도다. 방문 자체가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14년차 여행전문 기자.
온라인에서 ‘기곰천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 중인 여행작가.
계획 없는 여행을 선호한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길 위에서의 불확실성을 즐긴다
- 국내여행잡지 KTX매거진 기자
- 해외여행잡지 <에이비로드> 기자
- 대한항공 VIP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