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바로가기
  • 메뉴 바로가기
  • 하단 바로가기
  • 팔라우에서 아침을 맞이하기까지

    프린 프린 2011.01.17


    팔라우에서 아침을 맞이하기까지



      집을 떠나 여행지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가끔은 여행지에서의 시간보다 출발과 도착의 과정이 더 인상 깊을 때도 있죠. 수많은 기대, (칫솔이나 헤어 드라이어를 빼놓고 왔다는) 안타까움, 피로,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서 줄달음질을 치니까요. 제 글을 처음으로 겟어바웃으로 띄워보내며 저도 여행을 떠나던 순간을 돌이켜 보려고 합니다. 신들의 바다 정원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팔라우, 그곳에서 아침을 맞이하기까지의 이야기. 바다 사진은 한장도 없는 팔라우 여행기를 여기 내려놓습니다.



    기대


      2010. 12. 26.

      휑한 들판과 활주로 같은 도로엔 겨울 색이 완연했다. 추위로 기록을 경신하는데 재미가 붙은 계절은 그나마 열차 안에선 유예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정거장에 멈춰 한쪽 문이 일제히 열릴 때면 잊지 말라는 듯 가혹한 바람이 실내를 두드렸다. 그 심보엔 문신이 새겨진 근육을 뽐내는 사나이처럼 남세스러운 면이 있었다. 이번 여행지가 여기와는 180도 다른 계절이 지배하는 장소라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추운 나머지 크리스마스의 독특한 분위기조차 얼어붙지 않았던가. 덕분에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성탄절은 벌써 희미한 축제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흰 눈을 덮고 길게 길게 눕는 들을 보고 있자 오늘에서야 경건한 축일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여행 자체보단 다른 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번 여정에 함께 하기 위해 특별히 두 권의 책을 꼽았는데, 그 중 캐리어에 넣어 둔 검은색 하드커버의 에세이가 자꾸 마음을 끌었다. 추운 겨울이 당도했음을 깨닫고 문득 열대 향기 가득한 섬으로 떠나고 싶어졌다는 작가의 경험이 그 책의 첫 소재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겨울의 한복판에 남국의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점에서 비슷한 뿌리를 공유하는 셈이었다. 활자로 공감했던 정서를 직접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것이 공항철도 안에서 품었던 가장 큰 꿈이다.

     

      저자가 찾은 섬의 이름이 '바베이도스'라면, 내가 향하는 섬의 이름은 '팔라우'다. 어감만으로는 어쩐지 바베이도스 쪽이 더 이국적이고 아련하며, 심지어 천국에도 더 가까울 것 같다. 하지만 단어가 길고 모음이 세련되게 모여 있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를 다른 곳보다 높게 평가하는 건 불공평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점은 두 섬나라 모두 고운 모래밭과 야자나무, 뜨거운 바람이 쓰다듬는 갈맷빛 맑은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이다. 혹한을 피해 남국으로 떠나는 겨울 여행. 열에 일고여덟은 부러워할 만한 기회지만 에세이의 저자나 나나 운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바베이도스에 가져간 기대가 그곳에 의해 부서진 경험을 바탕으로 '기대에 대하여'를 썼고, 나는 이번 여행에 어떤 기대를 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며 '활자로 공감했던 정서'를 직접 체험한다는 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공항철도에서 내리자 하늘이 어지러웠다.


    ***


       의도치 않게 주로 겨울에 여행을 떠나게 된다. 싫지는 않다. 오히려 겨울 여행이 더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더울 때보단 추울 때 외로움이 짙어지기 마련이고, 여행 중 그런 감정에 사로잡히는 게 좋다. 타지에서 나의 존재가 작고 흐릿해지는 느낌이 좋다. 그러다 보면 영혼의 군살을 빼고, 까지거나 벗겨진 부위에 좋은 약을 바르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선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시도가 통하지 않는다. 적도에서 살짝 빗나간 곳에 자리 잡은 섬나라의 운명에 나 역시 동참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시사철 더운 나라. 건기와 우기의 이론적인 구분을 무시하고 언제 열대성 스콜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섬. 그러나 날씨만 좋으면 '신들의 바다 정원'이란 표현에 수긍하게 될 천혜의 바다 위에 표류하는 곳. 그곳에선 아무래도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고독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건 아니지만 내 작은 취향은 설 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떠나기 전의 나에게 팔라우는 현실성이 없었다. 예컨대 지구의 남반구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계절을 살고 적도는 일 년 내내 덥다는 사실, 머리로는 안다고 해도 직접 가보지 않고서야 피부에 와 닿을 리 없는 그런 사실들처럼 말이다. 내가 팔라우에 기대를 걸지 못했던 이유엔 어설픈 경험주의자 같은 면이 있었다.


     

    [caption id="attachment_45170" align="alignnone" width="600" caption="북위 7도 30분, 동경 134도 30분. 지구본을 돌려보고 싶은 말."][/caption]



      게다가 여행은 내내 즐겁기만 한 이벤트가 아니다. '이동'이라는 첫 단계만 봐도 그렇다. 나 역시 공항과 비행에 환상이 있지만 막상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면 고도 10,000km의 바깥 공기만큼 차가운 현실을 피할 도리가 없다. 추락이나 하이잭킹에 대한 공포는 제쳐놓더라도 선인장만 견뎌낼 것 같은 바싹 마른 공기, 발도 제대로 뻗을 수 없는 이코노미석의 비좁음, 끝없는 비행시간 안에서 느끼는 무력함이 한꺼번에 덮쳐든다. 이 모든 요소를 여행에 대한 기대만으로 무마하기란 불가능하다. 여행지로 가는 시간은 우리에게 저도 여행의 일부로 인정해 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깨닫는다. 짧게는 두세 시간에서 길게는 반나절을 기내에서 보내는 동안 항상 가슴이 두근거리며 여행을 하고 있다는 묘한 흥분과 나사 풀림을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바라마지 않는 이국땅에서의 시간을 위해 일종의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현지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조금 뒷좌석에 앉았다는 이유로 기나긴 줄 끄트머리에 서서 출국 심사를 받아야 하고, 나타날 기미가 없는 수하물을 기다리며 컨베이어 벨트를 쏘아보아야 한다. 게다가 공항 밖에는 관광객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잔뜩 벼른 택시 기사나 상점 주인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좋았다는 마침표는 집으로 돌아온 뒤 어느 날, 문득 좋은 기억으로 떠오를 때 찍히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흐뭇하고 아련하게 몽글 거리는 미래의 기쁨을 위해 현재의 여행을 기꺼이 감수한다.

     

    [caption id="attachment_45175" align="aligncenter" width="600" caption="나로선 구성 체계를 하나도 알 수 없는 날개를 보고 있으면 묘한 느낌,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곤 하지만."][/caption]


     

       그러나 이 모든 이유가 핵심은 아니다. 나의 기대 결핍증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내 안에 있었다. 기대를 품으면 곧 깨지기 마련이라는 학습효과를 통해 스스로 약을 쳤던 것이다. '큰 기대를 하고 있다가 실망하기보단 전혀 기대하지 않다가 만족하는 편이 낫다.' 지독할 정도로 실리에 기대는 이런 심보는 일종의 방어기제였으며 더불어 효과도 기가 막히게 좋았다. 사소하지만 뜻밖의 즐거움을 주는 작은 조건들만으로도 여행 전체의 인상이 확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 * * 



      팔라우 직항 비행기는 모두 밤에 뜨기 때문에 다섯 시간이 채 안 되는 비행이라도 그 피곤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팔라우 코로르Koror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3시 30분이었다. 한국의 거의 정남쪽이라 시차도 없었다. 기진맥진하여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후텁지근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영에 가까웠던 습도가 순식간에 백에 가까워지자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입구엔 몇 명의 현지인들이 다음 이륙을 위해 기체를 청소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손에 든 코트가 민망해지는 순간. 통로를 따라 걸어가는데 창밖으로 활주로와 구분하기 어려운 작은 에이프런이 보였다. 그곳엔 단 두 대의 비행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200여 석의 비행기와 그와 비슷한 크기의 외항기 한 대. 세상에 이렇게 소박한 공항도 있구나 싶자 이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일부러 기대하지 않으려는 나의 비뚤어진 심사가 돌연 잭팟을 터트리는 순간이었다.

     

     

     
      출입국 사무소는 조명 때문인지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누렜다. 입국 심사대는 반질반질한 목재로 짠 갈색 부스였는데 벽 색깔에 비해 지나치게 도드라져 보였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끈 건 누군가 서툰 솜씨로 벽에 그려놓은 섬과 원주민 그림이었다.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가 키스 헤링의 작품을 따라 그린 것 같기도 한 그 그림은 이제 남국에 왔음을 실감하라며 유쾌하게 웃어댔다. 혹시 입국을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타국의 이미그레이션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외국인을 맞이할 때 보통 이런 의식을 치른다는 세상의 규칙을 흉내 내 그냥 한번 만들어 놓은 곳 같았다. 공항의 크기나 설비부터 어쩐지 어설픈 면이 있는 팔라우의 첫인상에, 나는 이 섬이 마음에 들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털털 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한 컨베이어 벨트
     
      코로르 공항에서 시외버스터미널을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등유 냄새가 풍겨오고, 대기실 한쪽에는 행선지와 출발 시각이 빼곡히 적힌 시간표가 걸려 있는 곳. 입구 앞에서 우리를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서너 대의 버스도 그런 이미지를 심화시켰다. 어떤 장소가 시간과 오래 벗할 때 풍기는 분위기가 초여름 밤 같은 대기 속에 너울거렸다. 휴양지에 대한 막연한 선입관은 나로 하여금 이곳을 화려하고 상업적인 곳으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쓰레기통인지 적사함積沙函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자를 눈앞에 두고 그런 편견은 하나하나 교정되었다. 한동안 깨울 일이 없을 듯 보였던 나의 또 다른 취향도, 아침에 일어나 밤사이 눈이 내린 걸 보고 들뜬 아이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그 취향도 함께 버스에 올라 팔라우에 하나밖에 없다는 도로 위를 달렸다. 2차선 도로가 길게 이어졌고 주변엔 낡은 건물들이 잠들어 있었다. 어둠을 밀어내는 백열등 사이로 그들을 볼 수 있었다. 높은 건물은 거의 없었으며 간판은 지나치게 컸고, 본래의 색깔에 검은 때를 입은 벽이 부지기수였다. 사람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워하는 풍경이 있다면, 나에겐 여기가 그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갑자기 창밖의 거리를 걷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입구 입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과 전구, 겨우살이를 달아 놓은 상가를 기웃거리고 싶었다. 절대 눈이 오지 않는 섬나라의 사람들에게 털모자를 쓴 눈사람 인형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졌다. 70년대 미국 소도시를 연상케 하는 산세리프체의 광고 포스터에게 홀려 밤늦게까지 불을 밝힌 가게에 들어가 처음 보는 음료수 한 잔을 사 마시는 게 내 잠재된 환상이라는 것도 처음으로 깨달았다.

     

     

     

     

     

     

      물론 팔라우를 둘러싼 광대한 자연, 경이로운 바다에 비하면 이 거리는 너무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가이드도 낡아빠진 풍경을 농담거리 삼아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는 웃음을 통해 이 도시(?)에 대한 청중의 기대치를 낮추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투엔 애정이 묻어 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놀리는 와중에도 마음에 품은 우정을 숨길 수 없는 사람처럼. 그러다 갑자기, 화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가 하는 말의 행간을 읽게 됐다. 규격화되고, 깨끗하고, 빠르고, 정확하고,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에게 그는 팔라우를 즐기기 위해선 그 딱딱한 자세를 교정할 필요가 있음을 에둘러 일러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에겐 사는 장소를 휘황찬란하게 꾸밀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섬이 곧 그들의 집이고 바다가 곧 그들의 정원인데 더 완벽한 터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 



      짧은 심야 여행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가니 하늘은 동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발코니에선 네다섯 대의 보트가 매인 작은 선착장이 보였다. 짧은 수로는 곧장 바다로 이어졌고 지평선은 길고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장막을 드리운 섬의 등줄기였다. 그 위로 불길하진 않은 어떤 징조처럼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세상은 아직 어두웠는데, 별부터 바다까지, 수면등을 켠 편의점부터 아무도 없는 해변까지, 각자의 다양한 윤곽과 색깔을 구분할 수 있었다. 물에 엷게 탄 다홍색이 하늘을 천천히 채울 때마다 모든 사물이 캔버스처럼 그 빛을 빨아들였다. 그 때 첨벙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남자가 음료수 페트병으로 만든 낚싯대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조악해 보이는 도구가 한번 물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뭔가를 낚아 올렸다. 그는 발코니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오징어를 낚았다고 외치면서.



      세상이 느리게 눈을 뜬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한가로운 분위기에 피로도 한숨 돌리고 싶은 모양인지 몸이 가뿐해졌다. 점점 눈이 부셔오고 대기가 열기를 뗬다. 남국의 아침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자 황량한 바람이 불었던 12시간 전의 겨울이 스스로 여행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틈에 작은 기대가 빈자리를 채웠다. 이곳에 온 건 행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부러 기대하지 않으려던 약은 술수가 또 한 번 과녁에 적중한 셈인데, 기쁘지만은 않았다. 종종 마음껏, 가슴이 터질 때까지 두근거리고 싶을 때가 있다. 나에겐 기대도 연습을 해야 하는 감정이다. 여기서 그 솔직한 자세를 배워 갈 수 있기를. 팔라우는 어쩐지 그렇게 해줄 것만 같은 곳이었다.

     

     

     
    팔라우의 아침.



    ***



      다음엔 팔라우의 예쁜 바다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프린

    글과 사진과 커피를 좋아하는 초보 여행자. 전문적이진 못해서 그냥 주섬주섬 써내려가기만 합니다. 화려한 환상보단 솔직한 감상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D http://princia.tistory.com/

    같이 보기 좋은 글

    팔라우의 인기글

    프린 작가의 다른글

    전체보기

    SNS 로그인

    복잡한 절차 없이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댓글을 남겨보세요!

    겟어바웃 에디터라면 로그인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