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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 오는 날의 파리

    프린 프린 2011.02.15

    카테고리

    유럽, 서유럽




    비 오는 날의 파리



     

      겨울, 짧은 기간 동안 파리를 여행하다 비가 오는 날을 만났습니다. 욕심 때문에 하루동안 너무 많은 곳을 다닌 날이었죠. 머리가 멍해질 만큼 피곤했지만 비에 물든 파리는 쉽게 잊혀지지 않네요. 그날 걸었던 많은 곳들 중 몇 곳을 골라, 해가 뜨고나서부터 밤이 젖어들 때까지 빗속을 걸어보겠습니다.




    오 전


      겨울이 되면 프랑스는 우기에 접어든다. 특히 북부 지방에 비가 자주 내리는데 파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파리 사람들은 가벼운 비 정도는 그냥 맞고 다닌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흐린 하늘을 보게 되면 이곳 사람들은 우산을 챙겨 나갈까 아님 곧 세탁을 해야 할 두터운 코트를 입고 나갈까. 파리에 머물렀던 나흘 내내 날씨가 맑은 적이 없지만, 우산을 들고 나온 이들을 본 적도 없다. 그런 걸 보면 우산은 그들의 가방 안에 숨어있거나 집안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아침부터 비가 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우산도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동행했던 친척 동생의 우산은 그의 배낭 안에 있었고, 내 것은 한국에 있는 내 방 내 책상 위에 있었다. 어제와 똑같이 흐린 날씨 앞에서 동생은 설마 했던 것이며 나는 짐을 쌀 때부터 방심했던 것이다. 프랑스가 겨울에 우기라는 사실을 안 건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였다. 파리지앵들은 웬만한 비에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가이드 북의 말에 속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호텔에서 나와 첫 행선지인 방브 벼룩시장으로 가는 순간에도 나는 우중충한 하늘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텔에서 8호선 Balard 역까지 두 정거장을 걸어 트램을 타기로 한 결정에 매우 만족한 상태였다. 이른 시간에 걷는 파리의 주택가는 아주 매력적인 산책 코스였기 때문이다.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과 막 셔터를 올리는 잡화점, 그리고 벌써 개장한 카페 앞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는 남자까지. 하루를 시작하는 파리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 있고 활기차 보였다. 파리의 아침에 홀려 고단한 하루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파리의 아침.



      방브 벼룩시장은 재래시장과 골동품 시장의 기능을 함께하는 곳이다. 처음엔 생각보다 규모가 작다고 느껴지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가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아니,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를 건너뛰어 눈앞에 나타난 잡동사니들을 보고 있으면 파리가 얼마나 과거와 가까운 도시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아버지 세대가 쓰던 걸 그대로 내다 놓은 중고품들도 있는가 하면 옛날 귀부인들의 손에 들려있었을 법한 거울이나 장신구도 제법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끌었던 건 수 십 년 전 프랑스 사람들의 글이 그대로 쓰여 있는 엽서였다. 불어를 읽을 수 없어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엽서의 본래 역할이 그러하듯, 안부나 소식, 또는 사랑의 속삭임이 남겨져 있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의 이메일에 실리는 글보단 정성들인 문장들로 말이다. 그림과 필체가 마음에 드는 것 네 장과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는 한 장을 골라 값을 치뤘다. 그 중에선 1925년이라는 그 해의 년도가 적힌 엽서도 있었다. 장당 1유로씩(가격은 가판마다 다르다) 5유로에 내가 살지 못했던 시대를 공유 받은 기분이었다.

     


    별 이야기 아닐지도.



      그 밖에도 방브 벼룩시장에선 다양한 품목을 찾아 볼 수 있었다. 거의 100년 전 신문이나 사진, 중고 서적, 그림, 장난감, 의류, 잡화, 가구 등등. 그닥 저렴하진 않다는 게 단점이지만 볼거리는 풍성했다. 한국에선 박물관이나 시골집 다락을 뒤져야 찾을 수 있는 법한 것들을 파리에선 시장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하지 과거와 친해질 마음은 별로 없는 우리를 돌이켜 볼 때, 부럽고 또 배울만한 면이었다.



    방브 벼룩시장에서 만난 다양한 물건들.



      그렇게 중반쯤 둘러봤을 때였다. 희한한 물건들에 홀딱 빠져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메라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던 것이다. 설마 했지만 다음엔 볼 위로 차가운 게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후드를 뒤집어쓰자 그야말로 비다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가겠거니 했지만 간헐적이던 리듬은 점점 길어졌다. 내어놓은 물건들에 비닐을 덮거나 아예 장사를 접는 주인들도 보였다. 가벼운 비도 아니라 옷이 젖어 들어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딱히 비를 피할 곳은 없었기 때문에 걸음만 빨라졌다. 비닐 천막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비구름에 덮여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몸이 식어간다는 게 느껴졌다.


      불현듯, 그것도 무방비 상태로 비를 맞는다는 건 대체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그렇다고 경쾌하게 춤을 추며 들고 다닐 우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수가 있을까? 그저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땐 이 비가 그치길 바라며, 다음 목적지로 잡은 시테섬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뛰어들었다.




    오 후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한 생트 샤펠과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었던 콩시에르쥬리를 들렀다 나왔는데도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빗줄기는 굵어져 있었다. 좀 마르나 싶었던 패딩은 삽시간에 축 늘어졌고, 이제는 신발까지 절박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추웠다. 겨울에 비를 맞고 돌아다니다니 오늘 밤 병든 닭처럼 앓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비를 맞는 것도 여행이니까 감수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으로 더 이상 하늘을 원망하진 않기로 했다. 우리는 쫓기듯 노트르담 성당으로 달렸다.



    이곳으로 가자.



      노트르담 대성당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피난처에 온 것처럼 몸과 마음이 따뜻해 졌다. 내부도 인파에 비해선 조용한 편이었다. 불과 몇 발자국을 걸어들어 왔을 뿐인데도 사람들의 얼굴엔 밖에선 찾아볼 수 없는 편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추위와 피로를 몰고 온 비도 예배당 안의 아늑한 분위기를 해칠 순 없었다. 저마다 다른 인종과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비슷한 안식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



      예배당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화려했다. 만약 건축에 조예가 있었다면 여기에 한 바닥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도 모자랐을 것이다. 이곳의 공기는 외부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유입된 것 같았다. 내부로 스며든 흐릿한 햇빛 위에 떠도는 먼지조차 신성한 몸짓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또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들도 많았는데 특히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안고 타오르는 촛불의 물결이 백미였다. 그 하나하나엔 누군가의 사연과 기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저 이곳을 스쳐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이곳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간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 범위를 확장해 본다면, 크든 작든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사라지는 모든 인간들의 삶과 비슷한 면이 있는 셈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중 어디론가 여행할 여유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그러모아 가장 경건하게 세상을 축소해 놓은 곳 중 하나였다. 우린 기원의 촛불을 사진 않았지만 엽서를 통해 세상에 한 마디씩 던지는 자리에서 펜을 들었다.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다시 세상 전체로 퍼져나가면 좀더 살기 좋지 않겠냐는 글이었으며, 지금은 다른 이들의 엽서에 묻혀 그런 날이 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Noel.




    언제인지도 모를 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좁은 골목길이었다. 4호선인 Saint-Michel 역에서 Saint Germain des prés 역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고 생각된다. 노트르담을 오르내리느라 배가 무지막지하게 고팠고, 비에 젖어 축 가라앉은 옷 때문에 몸은 으슬으슬했다. 하지만 카페가 많았던 이 길엔 무작정 걷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습기 가득한 대기 속에서 카페의 조명은 차분하고 농도가 짙은 색으로 빛났다. 그 빛을 오랫동안 쬐며 걷고 있자니 점점 현실감각이 떨어졌다. 카페 말고도 서점, 꽃집, 식재료를 파는 상점들이 있었지만 몽롱한 분위기는 매한가지였다. 우리가 지금 어느께에 와있는지 모호해진 건 오래전 일이었고, 파리는 우리를 완전히 집어 삼켰다.


     






    그리고 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즈음, Concorde 역에 내려 샹젤리제 거리 위에 섰다. 시테섬을 떠나 몽마르트 언덕까지 올랐다 내려왔기 때문에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자 피로마저 잊을 만큼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늘도 울다 울다 지쳤는지 마침내 날도 잠잠해졌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산 온통 Paris라고 쓰여 있는 4유로짜리 우산을 접었다. 비에 젖은 거리엔 노란 불빛이 아른거렸고, 물웅덩이 위로 샹젤리제 거리가 복사되어 모든 게 두 배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파리에 왔던 첫날, 처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 때 느꼈던 아쉬움이 지금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렇다. 비가 그치고 난 도시의 얼굴은 지극히 아름답다. 높은 건물이 가득 메운 서울 한복판도 이럴 때면 누구나 시를 짓고 싶어질 만큼 낭만적으로 변하는 법이다. 하물며 여기는 낭만의 도시 파리, 그곳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거리가 아닌가. 모든 사람이 노래를 부를 것 같고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것 같은, 마법 같은 밤이었다.



     

    비에 젖은 거리.



      뮤지엄 패스를 이용해 개선문 전망대로 향했다. 가장 효율적으로 공간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가장 지독하게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나선형 계단이 이곳에도 있었다. 중간에 전시장 같은 곳을 지나 마침내 옥상에 올랐다. 고된 하루를 모두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아찔하다.



      개선문 전망대에선 샤를 드 골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12개의 도로를 두루 볼 수 있다. 마치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 같은 파리의 열 두 개 도로는 지금까지 만난 풍경 중 가장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를 사로잡았다(이 느낌은 파리를 돌아다니며 매번 갱신되다가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다). 어떤 녀석은 작고 소박했고, 어떤 녀석은 크고 화려했다. 저마다 분위기가 달랐고 오고가는 차량의 수에도 차이가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보는 순간 누구나 이름을 맞힐 수 있는 길, 샹젤리제 거리가 압권이었다. 저렇게 넓은 도로였던가 싶기도 하고, 저렇게 화려한 곳이었나 싶기도 했다. 점점이 움직이는 사람들,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의 라이트, 휙 하고 뛰어들면 풍덩 소리를 낼 것 같은 비의 얼룩. 그리고 저 끝에 하얗게 고개를 내민 관람차까지. 내가 아는 모두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지금 사랑에 빠져 있는 이들을, 아니 사랑에 빠지려는 이들 모두를 여기로 옮겨 놓고 싶었다.



    빛의 길.



      비가 내린 후 파리 전역에 커텐을 내린 밤안개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안개에 사로잡힌 에펠탑은 다락방에 올라가려는 아이처럼 구름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구름바다를 보고 싶었던 걸까? 밀도 높은 수증기 속에서 묵은 떼를 말끔히 씻어내는 중일까? 정각이 되어 조명까지 반짝거리자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진으로 남겼지만 그것도 턱없이 부족하다. 표현의 한계란 이럴 때 찾아온다. 영화 '콘택트'에서 베가성을 본 엘리가 이렇게 말했던가.
      "시인이 왔어야 했어요."



    렌즈와 필름으로는 표현하지 못할, 그런 장면이 있다.

     


      겨울, 비가 온 파리에 가려면 누구나 시인이 될 준비를 해야할지 모른다.




    프린

    글과 사진과 커피를 좋아하는 초보 여행자. 전문적이진 못해서 그냥 주섬주섬 써내려가기만 합니다. 화려한 환상보단 솔직한 감상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D http://princ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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