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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밤

    프린 프린 2011.04.05

    카테고리

    유럽, 서유럽, 지중해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밤 




    물의 도시 베네치아.

    유럽에는 낭만이란 수식어를 단 도시들이 참 많지만

    베네치아만큼 독특한 분위기의 도시도 없을 겁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옛 도시,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골목과 작은 배-.

    상상만해도 미소가 지어지겠죠.

     

    그렇지만 이번엔 밤을 맞은 베네치아의 풍경 스케치입니다.

    생각했던 것관 조금 달랐던 그곳의 느낌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          *

     


    13세기 유럽에 아시아를 소개하여 충격을 주었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훗날 많은 구라파 강대국들로 하여금 세계 이곳저곳을 침략할 꿈을 키우게 한 장본인 중 한명이며, 한편으론 많은 여행자의 대선배나 다름없는 마르코 폴로.

     

    어쩐지 실크로드보단 해로(海路)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름이다. 내가 처음으로 디딘 이탈리아의 땅도 바로 그의 이름을 딴 공항의 도착 터미널이었다. '동방견문록'의 진위 여부는 물론이거니와 마르코 폴로란 인물 자체가 그 존재를 의심받고 있는 요즘이지만, 어쨌든 베네치아 인근 공항의 타이틀로는 아주 그럴싸했다. 예전엔 유럽인이 마르코 폴로를 통해 아시아의 존재를 알게 됐었는데, 오늘날엔 아시아인이 동명의 장소를 통해 유럽의 존재를 체험하는 셈이다.

     

    공항에서 본 이탈리아의 첫 인상은 예상보다 딱딱했다. 여기선 모두가 등을 빳빳하게 세우고 다니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누렇게 보이는 공항 터미널 때문일까? 아니면 이탈리아어의 발음 때문일까?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있다면, 받아들이기 께름칙한 낯섬도 있다. 동의어라 해도 상관없겠지만 굳이 한자어가 주는 어감에 기대자면 '이질감'에 가까운 무엇이랄까.

     

    그나마 수하물 수취대의 위트가 아니었으면 우리의 자세는 한동안 경직된 채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한 카지노에서(마르코 폴로 공항 맞은 편에 있다고 한다) 빙빙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를 룰렛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자, 상상의 칩을 걸어 보자. 우리의 짐은 어느 홈에 빠져 나올까? 블랙? 레드? 짝수? 홀수? 아니면 00? 맞춘다면 하루 종일 엄청난 행운이 함께 할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배팅은 실패했다. 하긴 짐이 무사히 실려온 것만 해도 어딘가.

     

     

     

     

     

    돌려라!

     

     

    텔은 베네치아로 들어가기 전 내륙에 있는 메스트레란 도시의 역 앞 바로 앞에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공항에서 메스트레와 베네치아로 가는 버스엔 두 종류가 있다. ATVOACTV인데 전자는 공항버스, 후자는 일반 시내버스라고 보면 되겠다. 살짝 더 비싸긴 하지만 짐도 편히 싣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해 우리는 메스트레역 행 ATVO 티켓을 샀다.

     

    작은 도시를 향해 가는 여정은 20여분 남짓. 건축 양식이 다르다는 점만 빼곤 한국의 시골길을 가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거리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늘은 높쌘구름에 뒤덮여 있었고 태양은 구름 사이로 팔을 뻗느라 분주했다. 넓은 밭과 작은 마을, 그리고 갑자기 머리 위를 헤집고 지나가는 커다란 고가도로가 이탈리아 소도시 근교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베네치아로 가는 길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대충 짐을 푼 뒤 노란색 2번 버스를 타고 베네치아 본섬의 로마 광장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각은 아니었지만 겨울엔 야속하리만치 일찍 일을 접는 태양 덕분에 시간이 촉박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오고 싶던 곳에 왔다는 사실에 조금 흥분을 했는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맹수처럼 버스에서 내렸는데, 다리를 건너 산타 루치아 역앞으로 넘어가자 조바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운하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위에 몸을 띄운 작은 화물선이나 곤돌라 역시 느릿한 속도로 바다 안의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사람들도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골목을 따라 섬 깊숙히 들어갈 때만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유입되는 물처럼 속도가 빨라질 뿐이었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물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우리도 그 힘을 거스를 순 없었다. 이미 한 폭의 유화 속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선 모든 것이 물 위에 떠있다. 저 크고 낡은 건물들이 무엇에 의지하여 서 있는지, 118개의 작은 섬과 455개의 다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물의 도시는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이며 오랫동안 견고함을 유지해 왔다는 걸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수면 위로 솟은 빛바랜 파스텔 풍 건물들은 바다 깊은 곳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보는 이가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도 그 안정감 덕분이다. 우리는 짙은 해초색의 바다를 따라 출렁일 필요가 없다. 딱딱한 지면을 밟고 서서 참으로 고요하게 흐르는 시간을 지켜보면 그만이다.

     

    건물의 그림자가 가리지 않은 수면 위에 연한 자줏빛과 분홍빛이 감도는 하늘이 비쳤다. 메론 조각 같은 곤돌라가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건너는 중이었다. 수없이 많은 창문, 수없이 많은 정박선, 수없이 많은 투박한 선착장도 베네치아란 캔버스 안에선 혼란스럽지 않았다.

     

     

     

     



     

     
     
    물의 도시. 곤돌라의 도시.


     

     

    우리도 일련의 사람들을 따라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 다섯 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햇살은 미로 안까지 닿지 않았다. 굳게 닫힌 창문 때문에 도시는 텅 빈 것 같았고 몇몇 방랑자들만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배들은 오래 전에 버려진 가구처럼 수로의 난간에 매여 있었다. 섬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손님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주인은 부재중이었다. 맞이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외롭게 만들었다.

     

     


     

     
     
     
    골목만큼 좁은 수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내리 깔렸다. 회색 벽은 명도를 잃고 몸을 숨겼다. 도로와 건물의 구분이 모호해지자 마치 밤바다를 걷는 것 같았다. 그럴 때 우리를 인도하는 건 간간히 문을 연 거리의 상점들이었다. 아담한 내부에서 새어나오는 오렌지빛 조명은 어둠 위에 둥둥 뜬 섬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조각배였다. 섬과 섬 사이를 오고가다 이내 정적만 남기며 발걸음을 돌렸다. 상점은 눈을 꿈뻑거렸고 저 멀리 어느 골목에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베네치아가 이렇게 쓸쓸한 도시였던가. 내가 이곳에 꼭 오고 싶었던 건 사소한 동기에서다. 그것은 여행을 떠나기 몇 개월 전 읽었던 이병률의 '끌림'에서 비롯되었다(떠나면서 들고 오기도 했다). 필름으로 찍은 게 분명한 사진들이 좋았고, 특히 베네치아를 향한 작가의 애정이 인상적이었던 책.

     

    다시 태어난다면 베네치아가 좋겠다는 그가 "물, 유리, 레이스, 가면, 곤돌라, 광장. 베니스를 수식하는 이런 말들이 아무리 베니스 여행을 결심한 당신 가슴에 미리 떠다닌다 해도 정작 베니스의 아름다움은 베니스에 도착하는 그 순간에만 만날 수 있다."고 단언할 때, 나의 마음은 이미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른 내가 만난 건 아름다움 뒤에 숨은 적막함이었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배신감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감사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외로움을 피해 외로움 속으로 뛰어든(전자와 후자는 다르다) 그가 왜 이곳을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디선가 만났을지도 모를 풍경.


     

    리알토 다리까지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노란색 표지판이 우리를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누군가가 손으로 그려 놓은 화살표가 보이기도 했는데, 그 어설픈 필체엔 따라갔다간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할 것 같은 장난기가 묻어있었다.

     


     

      

     

     



     
     
     
    리알토 다리로 가는




     



    일단 리알토 다리에 도착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거의 모든 가게들이 영업 중이었고 시장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공중에 떠있는 은하수 조명 장식도 활기를 더했다. 기념품이나 군것질거리를 사는 이들은 상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리알토 시장


     

    다리 위에선 야경을 바라보는 연인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반은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반은 그들의 입술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유럽에서 꼭 한 가지만 가져오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어디서라도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연인들의 옆모습이다. 유럽에 발을 디뎌 처음으로 키스하는 연인과 마주치면 우리는 전혀 다른 문화에 놀라곤 한다.

     

    하지만 민망함도 잠시 뿐 어느새 그런 풍경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유럽은 역시 다르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호와도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순간을 공유할 땐, 좀 더 그 감정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카페테리아의 불빛,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포레토, 유심히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는 철썩거리는 물결의 노래. 이곳에선 밤의 여신도 곤돌라를 타고 다니며 어둠에 젖은 소매를 펼치리라. 리알토 다리에서 보는 야경은 연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만큼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어떤 논리적인 인과관계도 없이, 야경에 사로잡힌 순간에, 정확히는 다리를 건너 좀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순간에,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러나 이런 야경을 놓칠 순 없다


     

     

    이후로는 식당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지금껏 가격표를 유심히 봐둔 덕분인지 (가이드 북에서 지적한 대로) 산 마르코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음식값이 비싸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면, 캔디, 초콜렛, 인형 등 온갖 잡화들을 둘러보며 마음을 끄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중간에 우리를 불러 세우는 한 여자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우리를 친구처럼 불러세우더니 곧 요리 재료가 될 운명에 처한 게를 가리키며 저것이 살아있다고, 섬뜩하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놀랍다는 말투로 동의해 주었다. 지금도 우리 동네 횟집 앞에서 뻐끔거리고 있을 장어나 참게를 본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얼마 걷지 않았는데 갑자기 광활한 장소가 나왔다. 'ㄷ'자 형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터였다. 잠시 어리둥절해 져 설마 여기가 산 마르코 광장이겠나 싶었지만 진짜 산 마르코 광장이었다. 리알토 다리에서 10여분 밖에 걷지 않았는데 벌써 여기까지 왔다니. 지도로 가늠해 본 거리보다 훨씬 짧아서 '사소한 간격'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예정에 없었던 곳을 얼떨결에 찾은 김에 잠시 주변을 돌아다녔다.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광장은 어두웠다. 모든 상점은 불을 끄고 있었고 항상 광장을 가득 메운다는 비둘기들도 잠자리를 찾아 간 모양이었다. 결국 다음 날 다시 찾아야겠다며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밤의 광장
     

     

    산타 루치아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식당 하나를 찾아 들어가 식사를 마쳤다. 배도 부르고 밤도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했다. 엄밀히 말하면 제대로 역을 찾아가는 중이긴 했지만 얽히고 섥힌 골목에선 맞는 길 조차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곤 했다. 빛이 힘을 잃자 어둠이 그 틈을 타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종종 화려한 유리 공예품을 파는 상점에 들러 숨을 골랐다. 반지와 귀고리부터 목이 긴 술병과 술잔, 거기에 동물의 형상을 갖춘 커다란 화병까지 유리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이 이곳에 있었다. 집집마다 반값 할인 중이라고 광고지를 붙여놓긴 했지만 솜씨만큼이나 가격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쇼윈도 안에서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공예품들도 어둠이 빚어낸 것처럼 어쩐지 현실감이 떨어졌다. 아마도 석호潟湖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모양이었다. 이 섬에 처음 발을 디딜 때 느꼈던 감정, 마치 주인이 자리를 비운 땅에 들어선 듯한 서름함이 그 바람을 따라 베네치아의 골목을 쓸어내고 있었다.

     

    이병률의 문장대로 "물, 유리, 레이스, 가면, 곤돌라, 광장"처럼 베네치아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수도 없이 많다.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인상으로 이곳을 기억할 것이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목까지 나를 따라온 건 거대한 땅과 이별하고 홀로 빛을 내는 작은 섬의 인상, 비좁은 골목에서 발끝에 채이던 외로움이었다.

     

    카니발이 벌어질 때나 뜨거운 여름에 베네치아를 다시 찾는다면 오늘과 다르게 느껴질까? 외로움은 불현듯 찾아오곤 하지만, 때론 우리가 기꺼이 그 속에 몸을 담그기도 한다. 그런 마음의 잠수가 마음에 들었던 나는, 아마 미래의 어느 날에도 베네치아란 섬에서 쓸쓸한 걸음을 옮길 터이다.

     

     

     

     
     
     
    베네치아의 밤
     





    프린

    글과 사진과 커피를 좋아하는 초보 여행자. 전문적이진 못해서 그냥 주섬주섬 써내려가기만 합니다. 화려한 환상보단 솔직한 감상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D http://princ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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