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감성 여행

여행만큼 아날로그적인게 또 있을까?

한국에서는 하루의 절반도 넘는 시간을 컴퓨터에 할애하고, 운전할 때는 네비게이션에 의존하고, 
심지어는 신호 대기를 못참아 운전 중에도 틈틈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여행만큼은 온전히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아날로그적인 시간이다.

떠나기 전에는 '실시간으로 멋진 사진을 올려야지.', '그날 그날의 여행기를 써놓을 거야',
'사진 편집까지해서 예약 포스팅을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야심차게 노트북과 스마트폰 보조 배터리를 준비한다.

▲ 요즘은 구글맵과 여행어플로 다니지만, 그곳의 더 깊은 정보는 현지 가이드북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여행을 가면 처음의 계획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가져간 디지털 기기는 짐이 되어 버린다.
1분1초 매 순간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새롭고 재미난 것을 찾기도 바쁜데,
언제 노트북을 켜고, 사진과 글을 정리하고 있느냔 말이다.
충전도 귀찮다. 어쩔 수 없이 카메라는 해야 하지만 여행 중반쯤 가면 그마저도 아침에 헐레벌떡 챙기기 된다.

▲ 스페인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난 다음날 음반가게에서 구입한 CD.

선택할 겨를도 없이 아날로그적인 사람이 된 나는, 여행중에 만나는 옛 느낌에 더욱 정이 간다.
메일이나 페이스북 주소가 아닌 집 주소, 커피 컵에 써놓은 내 이름,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포스트잇,
특별히 아름답거나 나를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손글씨 종이에서 건네는 이의 선한 마음이 느껴져 좋다.

▲ 캐나다 로키 여행중 BC주 오카나간에서 왔다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지'라며 아이들과 함께 꼭 자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는 쪽지를 남겨 주셨다.

▲ 쪽지에 남긴 주소는 Penticton에 있는 스타벅스 주소. 아침 9시에서 11시까지는 스타벅스로, 아닐 때는 오카나간 호수로 찾아오란다.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오카나간 호수는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되었다.

▲ 오래된 쉐보레를 개조해 여행하는 멋쟁이 오카나간 할아버지. 

▲ JAL 항공의 인상을 결정지은 승무원의 호빵맨 그림.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소소한 재미랄까.

▲ 항공사 수화물 태그에 그려놓은 원숭이 그림은 정말이지 너무나 깜찍했다. 내게만 이렇게 그려준 건 아니겠지만.

▲ 캐나다 여행중 재스퍼의 한 호텔에서 받은 하우스키퍼의 쪽지. 아마도 워킹 홀리데이를 하는 한국 학생이었지 싶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손편지로 답장하고, 한국에서 가져온 즉석 미역국과 북어국, 사골 우거지국까지 몽땅 털어 놓고 왔다.

▲ 그(그녀)가 놓고간 커버를 씌운 깨끗한 소파배드에서 꿀잠자는 (당시 9개월) 둘째군.
떨어질까봐 베개, 테이블, 소파, 식탁의자까지 총 동원해 침대 가드를 만들었다. 

▲ 아이는 여행중 처음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엽서'라는 것을 써보았고, 우표의 존재를 알게되었다.

▲ 바르셀로나 성가족 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내부의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딸아이의 그림

여행에서만큼은 나와 아이도, 종이에 생각과 마음을 채운다. 
여행중 우리는 손글씨와 궁합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