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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라우에서의 단상 - 섬과 리조트

    프린 프린 2011.12.09

     

    팔라우, 섬과 리조트

     

     

    고 부식된 것에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팔라우의 유일한 포장도로를 따라 걸을 때 고향에 온 듯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시내라고 해도 번잡함이 없고 유명 상표라고는 맥주나 음료수 몇 종류 밖에 눈에 띄질 않는 곳. 도로 안쪽으로 멀뚱멀뚱 앉아있는 건물들 역시 현대 건축의 매끈하고 세련된 손길에 전혀 혜택 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주물로 통째 짜 놓은 게 아닌가 싶은 콘크리트 건물과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생생한 베니어판, 그리고 한국 기와의 곡선미를 어설프게 대량생산한 느낌을 주는 슬레이트가 한 집마다, 멀어도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반복됐다. 이곳의 시간은 거의 멈춰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느리게 노를 젓는다는 게 실감이 났다.

     

     

     

     

    팔라우가 가장 비현실적으로 변하는 시각은 정오다. 빈틈없는 남국의 태양으로 인해 그림자가 사물의 경계로 말려 들어가면서 만물의 입체감이 사라진다. 강렬한 조명을 받고 있는 그림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스팔트 위를 걷자 신발 밑창에서 쩍쩍 고무 늘어붙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차가운 캔 음료라도 마시면서 시간의 유속만큼 걸음을 늦추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해 졌다. 여행 안내원조차 섬 안에선 할 일이 없다고 혀를 내두르는 도시에서 나는 바다와 나란히 세워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매력을 느끼는 중이었다.

     

     

     


     

    라우 여행의 핵심은 바다다. 다이빙이나 스노클링 같은 해양 스포츠를 매일 지역을 옮겨다니며 즐길 수 있을 정도로 해상 활동이 중심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정은 오후 5시 정도면 끝나 버린다. 팔라우의 밤이 길다는 비명은 바로 그 때부터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럴 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술을 상자째 사들이거나, 고향의 TV 프로가 나오는 채널을 켜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한다.

     

    호텔 발코니에 앉아 책을 읽고 싶다는 갈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행지에서 독서를 한다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평소보다 시간이 두 배는 빨라지는 여행기간 동안 우리가 제일 먼저 포기하는 게 바로 수면과 독서 아니던가. (때론 씻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섬나라에서 더운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맥주 한 캔은 어디서든 펼칠 수 있는 책 한 권과의 싸움에서 대체로 승리한다.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일’과 ‘이곳에서 하면 다르게 느껴지는 일’ 사이에서 불공정한 경쟁이 벌어지는 셈이다.

     

     

     

     

     

    그런 정보를 미리 접한 사람이라면 리조트를 선택할 때 많은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바다로 나가지 않는 시간도 좋은 기억으로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리조트 안에 아이들이 안심하고 놀 수 있는 수영장이 있습니다” 또는 “리조트의 인공 비치에서 트로피칼 빛깔의 칵테일을 홀짝이세요” 같은 광고 문구를 눈 여겨 본다.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완전히 자리비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품는다.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방과 남의 집 발코니가 보이는 방 사이엔 은행 잔고라는 비극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코로르의 낙후한 거리를 보며 현실적인 절망과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나름 번듯한 호텔을 잡은 자신의 용기에 박수를 치고 싶을 것이다. 낙원은 보도 블럭을 따라 이어진 야자수와 버섯처럼 생긴 군도가 보이는 객실에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비치 체어에 앉아 파라솔 그늘에 숨을 때야 물리적은 물론 심리적으로도 일상과 멀어진 기분이 든다.

     

    호텔과 리조트의 경영진도 이런 심리를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한 최대의 환상을 재현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집에선 느끼지 못했던 뿌듯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바람에 흔들리는 해먹과 배가 불룩한 칵테일 잔과 몽롱한 향이 나는 마사지 크림을 준비해 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담장 밖의 팔라우와 리조트 안의 팔라우는 서로 극명한 대조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와 한자를 병기해 놓은 금색 양각 로고는 호텔 시설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준특급 호텔로 분류되는 씨패션 호텔 앞에 처음 섰을 때였다. 일급, 준특급, 특급 같은 단어는 얼마나 모호한 느낌을 주는지. 가격표를 봐야 비로소 서로 간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수영장과 만처럼 생긴 해변을 눈으로 확인하자, 준특급이란 호칭을 얻기 위해선 어떤 시설을 갖춰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이곳은 거대한 규모보단 포근하고 사적인 시간을 약속하는데 중점을 둔 곳 같았다. 목재로 짠 바닥은 수영장의 파란 타일벽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 주변으로 역시 나무로 만든 비치 체어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수영장 타일과 똑같은 색의 파라솔 밑에서 한 여자가 독서에 빠져 있고, 고개를 들면 바로 바다가 보일 정도로 해변이 가까이 있었다. 연청색으로 빛나는 바다엔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서로 물을 뿌리며 장난을 쳤다. 한가로움이 지팡이를 짚고 휘적휘적 걸어다니는 듯한 분위기였다. 객실이 꽉찼다고 들었는데 호텔 안에 사람은 거의 없는 걸 보니 다들 먼 바다로 떠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해가 질 즈음이 되면 물놀이 지친 이들이 돌아와 이곳에서 편안한 저녁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곳은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거친 바다와 달리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놀게 놔두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좀 더 환상에 가까운 안식처.

     

     

     

     

     

     

     

     

    그렇다면 팔라우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리조트는 도대체 어떤 곳일지 궁금해 진다. 팔라우 퍼시픽 리조트, 줄여서 PPR이라 불리는 리조트는 제일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이곳은 야자수가 늘어선 넓은 해변과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레스토랑과 바, 그리고 예약제로 운영되는 스파 시설을 갖추고 있다. 섬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인공 낙원인 셈이다.

     

     

     

     

     

    나무가 무성해 빛이 적게 들어오는 PPR의 입구는 세련된 인상을 주진 않는다. 사실 팔라우의 모든 건물이 그렇다. 바다와 접해 있는 곳엔 많은 신경을 쓰지만 내륙을 관리하는 덴 조경이란 단어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군다. 벽은 항상 색이 바랜듯 보이고 내부 장식 역시 토속적이지도 그렇다고 현대적이지도 않은 어중간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새나 물고기, 원주민을 형상화한 부조는 주술적인 영감을 주는데 실패했고, 채도가 낮은 바닥 타일은 걷는 이를 흥겹게 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특급 리조트라고 해서 수수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이곳의 첫인상이란, 해변을 한 번 보기만 하면, 파도에 뒤집어지는 나룻배와 같았다. 그것도 이자까지 함께 갚으며 말이다. 

     

    야자수 위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지 않아도 남국은 훈훈한 바람으로 화답한다. 백사장에선 바다보다 하늘이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직선과 수평선의 한계가 없는 거대한 스크린 위에서 난층운이 하늘을 덮고 적운이 봉우리처럼 쌓여가는 걸 지켜보았다.

     

    시시각각 크기와 형태를 바꾸는 대규모 움직임이 인간은 흉내 낼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어떤 솜씨를 부렸든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이 이 앞에선 초라해질 것이다. 그저 파라솔과 의자를 배치하고 열대 음료를 제공할 정도의 서비스 정신만 있다면 누구라도 이곳에 특급 리조트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휘황찬란한 시설이 없어도 자연이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니까.

     

     

     

     

     

    하지만 우리는 해변가에 누울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리조트를 한 바퀴 돌아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객실엔 대리석으로 된 세면대와 뾰족하게 솟아 텐트를 연상시키는 천장, 반쯤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가 있었다. 유명한 스파 체인은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향기를 풍기며 얼굴이나 발, 또는 전신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해변의 바는 값비싸지만 한 번 쯤 마셔줘야 할 것 같은 칵테일을 팔고, 아직 영업을 개시하지 않은 레스토랑도 해가 진 후의 근사한 저녁식사를 기대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부두였다. 손님만 있다면, 바다로 오고 가는 모든 배가 이곳을 거쳐갔다. 사람들은 리조트 밖으로 걸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먼 바다도 리조트에서 출발해 리조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게다가 거의 모든 욕구를 시설 안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발품을 팔아 현지인의 삶과 마주칠 필요가 없었다.

     

    완벽하게 독립된 그들만의 공간이었으니, 팔라우 관광을 하러 왔다고 해야 할지 팔라우 리조트 관광을 하러 왔다고 해야 할지 애매모호했다. 나는 이십 여 분 만에 이곳에서 모든 일정을 보내는 게 - 자연의 마술에도 불구하고 - 내가 팔라우에서 바랐던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다음으로 방문한 - PPR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 로얄 리조트는 한결 체계가 잡힌 서비스(당시엔 일본계 호텔 그룹의 소유였기에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와 보다 현대적인 이미지를 갖춘 곳이었다. 하지만 PPR부터 이어진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우리가 팔라우에 기대했던 건 머릿속을 싹 비울 정도로 완벽한 휴양뿐이었을까?

     

     

     

     

     

     

     


     

    리가 묵은 호텔에도 부두와 해변이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부두는 현지인들도 함께 사용하는 공용 주차장에 가깝고 해변 역시 호텔 소유가 아닌 야생(?)의 바닷가라는 것이다. 표지판은 ‘이곳에서 수영을 하다가 겪는 모든 위험은 본인 책임’이라고 분명히 경고한다. 아무리 봐도 투숙객을 위한 물놀이 장소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호텔 주변으론 편의점과 다이빙 전문 업체, 그리고 주유소도 하나씩 포진해 있었는데, 셋 모두 그 낡음으로 인해 운치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우린 고급 리조트가 부럽지 않았다. 남자 둘의 정서에 이곳 호텔만큼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없었다. 

     

    걸어서 8분 정도 걸리는 마트에 가면 간식거리에서 생필품까지 원하는 건 다 구할 수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나 1달러에 파는 아사히 맥주 같은 품목은 그 의심스러운 가격에도 불구하고 한 캔 집어들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했다. (팔라우에선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도 세일을 해서 팔 수 있다. 결국 한 캔을 사 마셨는데 맛은 없었다.)

     

     

     

     

     

    하지만 뭘 사기 위해서라기보단 마트까지 가는 길 자체가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이곳은 현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다시 없는 산책로였다. 리조트와 다르게 오직 실용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다세대 주택이 두 군데 있었는데, 사람이 자는 건물에 버젓이 들어선 카라오케의 현수막과 복도 난간에 걸린 빨래가 대조적이었다.

     

    포근한 세제 냄새를 풍기는 빨래방을 지날 땐 시간을 오래 끌고 싶어지고 무리를 지어 어울리는 덩치 큰 패거리는 얼른 피해가게 됐다. 쓸 만한 자동차들은 중고차 판매상에 모여들었다. 떠있는 것조차 신비한 낡은 배들도 바닷가를 따라 정박했다. 어느 풍경 하나 거만을 떨거나 허세 부릴 줄을 몰랐다.

     

     

     

     

     

    밤 마실을 다녀와 한국 방송 프로그램이 나오는 채널을 틀어 놓고 다양한 알코올을 마시며 객실과 발코니를 오가는 것도 좋았다. 방 안은 시원했고, 밤바람은 습하지만 신선했다. 종종 주민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밤이 되면 호텔 앞 벤치에 모여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알아듣기 힘든 억양의 영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함께 담배를 피우고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며 서로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대화를 즐겼다. 바다로 나갈 때 동행했던 필리핀 출신의 가이드는 항상 웃는 인상이었고, 몸집이 큰 원주민 택시 기사는 어떻게 운전을 해서 돌아갈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출신지를 묻고 한국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길 건너에 있는 성인 바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맥주를 마시며 담배에 불 붙이기를 반복했다. 문득 그들은 어떤 걱정을 하며 살까 궁금해 졌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의 인상은 무언가에 쫓기다 피신해 온 사람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고급 리조트의 완벽한 서비스보다 마음을 위로했던 건 현지인들의 태평한 일상이었다.

     

     

     

     

     


     

    가 팔라우의 낡은 건물에 매력을 느꼈던 건 향수를 느끼게 하는 미학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집이 누렇게 변하고 간판에 녹이 슬어도, 그렇게 건물이 세월을 먹게 놔두어도 개의치 않는 성근 의식 때문이기도 했다. 한 번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잔뜩 잡아오고, 그걸 팔아 번 돈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매일 무언가를 부수고 새로 짓는 꼴을 볼 필요도 없고, 지하철이나 버스에 구겨져 들어가 어디론가 실려갈 필요도 없는 사람들. 돈과 시간과 명예와 성공의 굴레에 조금이라도 덜 얽혀든 사람들. 그들의 삶은 신이 축복한 바다를 닮았다. 우리가 바라던 이상적인 낙원은 리조트에서의 휴양보다 이 섬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더 가까이 있을지 몰랐다.


     

     

     

    프린

    글과 사진과 커피를 좋아하는 초보 여행자. 전문적이진 못해서 그냥 주섬주섬 써내려가기만 합니다. 화려한 환상보단 솔직한 감상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D http://princ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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