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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숙하면서도 낯선 서울의 장소들

    한유림 한유림 2016.12.15

     

    느슨한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도시 재생과 보존>이라는 대학원 수업에서 서부 용산 일대의 오래된 -시간이 멈춘 채 잊혀 가거나 재개발되려는-장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위 ‘핫’하고 ‘힙’한 곳만 찾아다니던 내게 구태여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던 낡고 오래된 장소들이라니. 어려운 주제였다. 정마을로 향하는 길에 보았던 평창동의 풍경은 이탈리아의 작은 어촌마을인 친퀘테레와 참 많이도 닮아 있었다. 서울의 장소들을 답사하는 동안 여행지에서 보았던 비슷한 풍광들이 겹치면서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여행지가 아님에도 시간과 돈을 들여가는 이유에 대한 의문이 따라다녔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작고 오래된 마을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보다 날것 그대로의 모습과 그들의 소시민적 삶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라면 이번 수업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은 답사 자체를 여행으로 인식하면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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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저마다의 무수한 이야기가 존재하고 보는 방식에 따라 그 공간과 장소가 새롭게 보일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번 글에서는 장소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기억을 덧붙여 익숙하면서도 낯선, 오랜 세월을 간직한 서울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도심 속 여유를 찾는 공간, 약현성당

    약현성당

    구불구불한 청파로를 따라 길을 오르다 보면 오래된 명작처럼 자리하고 있는 약현성당을 만날 수 있다.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 이름인 '약현'에서 유래한 이 성당은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졌다. 붉은색 벽돌조 건물과 중앙에 뾰족이 솟은 첨탑은 화려한 장식도 없고 웅장하지 않지만 차분하고 담백하다. 스테인글라스와 아치형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내부는 아늑하고 경건하다. 성당 앞에 조성된 산책로는 약현성당의 또 다른 면모. 기도 동산이라 불리는 산책로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여유로움을 선사한다. 약현성당에서는 현재의 시간도 느리게 흐를 것 같다.

     

     

     

    오히려 이국적인, 서소문 아파트

    서소문

    전도연, 하정우 주연의 <멋진 하루> 속 배경지로 알려진 서소문 아파트는 올해로 44년이 된 주상복합 아파트이다. 만조천 물길 위에 자리 잡아 건물 두 채가 부채꼴 모양으로 붙어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선형식 아파트가 되었다. 3층에서 (4층 없이) 5층으로 이어진다던가, 동과 동 사이에 개구부를 두어 아파트 뒷골목으로 또는 철도변으로 끊어지지 않게 연결된 구조는 우리네 옛 정서와 삶의 방식을 잘 담고 있다. 서소문 아파트는 힘겨운 삶의 터전으로, 시대와 동떨어져 보이지만 오랜 아파트가 표상하는 것들에 대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서소문 아파트는 미래문화유산 후보로 선정되었다.

     

     

     

    생경한 풍경, 용문시장

    용문

    오래된 동네에는 그 세월을 함께한 오래된 시장이 있기 마련이다. 용문시장은 사람 냄새나고 정감 있는 전통 재래시장의 모습과 세월이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낡은 모습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소소한 맛집들이 즐비한 시장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면, 여기가 과연 서울이 맞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또 다른 용문시장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을 짐작케 하는 제멋대로 난 좁은 골목길. 인적 없는 가게 터는 공허했고 비닐 천막 사이로 언뜻 비치는 가판대의 물건들은 좀,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다. 용문시장은 어쩌면 곧 사라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서울의 한 단면이 아닐까

     

     

     

    good year, 염천교 수제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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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박한 간판들이 두서없이 걸려있고 가판대에 주욱 늘어선 수제화들은 꾸밈이 없다. 200미터 남짓의 짧은 거리지만 순식간에 60년대로 시간여행을 온 것 같다. 이 거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심리적 시대가 달라지는 것.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제화 유통단지이다. 수제화 거리는 서울역에 생긴 화물 창고로 가죽이 밀거래되면서 그 가죽을 이용한 잡화상이 서울역 주변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군 군화를 개조해 신사화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60-70년대에 호황기를 누렸다. 수제화에 대한 수요 감소와 값싼 중국산의 등장으로 한때 철거 위기에 처할만큼 쇠퇴하였지만  “명품 가죽 수제화”라는 타이틀과 40년 이상된 장인들의 자부심은 명불허전이다. ​굳이어 댄스화는 Good Year. 좋은 시절을 뜻한다고.

     

     

    수제화거리

     

     

     

    전통과 현대의 균형, 문화역 서울 284

    문화역서울

    서울역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집약된 근대의 상징 그 자체이다. ​공간은 행위에 의해 완성되는 것. 문화역 서울 284는 서울역이 신축됨에 따라 엣 서울역이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개방된 복합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인공스럽고 억지스러운 변화가 아닌 옛것을 보존하면서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변화. 문화역 서울은 서울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가장 이질적인 장소인 것 같다. 교통과 교류의 관문이었던 옛 서울역에서 다양한 문화예술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옛 것이 곧 새로운 것, 열정도

    열정도

    문배동 주상복합 단지 속, 시간이 멈춘 듯 고립된 거리가 마치 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열정도. 재개발의 취지를 살린 작은 공간들로 채워진 장소이다. 열정도는 '청년 장사꾼'이라는 청년기업이 이 거리에 식당을 내기 시작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는 인쇄소나 부품 가게 등 옛 감성이 깃든 공간을 젊은 세대가 즐긴다. 그러니 음식점보다 장소 자체가 목적이 되는 문화에 가깝고, 단절된 문화를 이어가려는 희망이기도 하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 만큼이나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겹쳐 만들어내는 열정도의 풍경은 다채롭다. 곳곳에 위트 있는 요소들은 즐거움을 선사하고, 사람들에게는 긍정의 기운이 서려있다.

     

    "서울의 힙 타운이 말해주는 가장 큰 요소는 축적된 시간이라는 정신적, 비물질적 가치가 실제 세계의 고부가치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는 시간이 쌓여 형성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과 낮은 주택들이 있다. 구 시가지의 도시적 요소들은 사람들을 더 움직이게 한다. ​길가의 가게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쉽게 길 건너편으로 갈 수 있다면 사람들의 상호 이동성 역시 높아진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상호 이동이 가능한 동네를 돈 주고 바로 만들 수는 없다. 12년 된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서는 12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구 시가지라는 지역 조건이 힙 타운의 토양인 셈이다." -서울형 젠트리피케이션의 공식, 박찬용

     

     

     

    사람 냄새나는 북정마을

    북정마을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북정마을은 최고의 산책 코스이다. 재개발이 무산된 후 북정마을 주민들의 다음 행보는 자체적으로 잔치를 열고, 공방을 운영하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만들어가며 이 마을을 보존해 나가는 것이었다. 북정마을의 대표적인 마을 잔치인 '월-월 축제'를 함께하고, 동네 구석구석을 거닐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충만해짐을 느낄 수 있다. 담벼락 위 깨진 유리병 조각은 북정마을의 유일한 방범 시설. 적어도 이 마을에서는 수직이나 수평적인 잣대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소박하고 느린 삶에 가치를 두며 좋지 않은 일에는 헛헛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 북정마을은 여전히 불편한 것들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이곳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서울 속 은신처, 심우장

    심우장

    북정마을 중턱에 위치한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의 성북동 거처였던 곳으로 ‘자신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남향으로 집을 짓는 우리의 전통과 달리 심우장이 북향인 이유는 남쪽에 조선총독부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옛 한옥과 탁 트인 전망이 이루어내는 정취는 그 자체로 위로를 전한다. 마음을 비우기에 더없이 좋을 공간. 심우장에 오면 늘 마음의 평온을 얻고 간다. ​

     

    오래된 공간의 은근한 힘 서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서울이 존재하는 것 같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베어있는 장소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잔잔하게 마음의 울림을 준다. 요 근래 익선동이나 연건동처럼 오래된 동네가 이슈화되고 앤트러사이트나 대림창고 같은 방치돼 있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카페가 유명세를 치르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까? 이것들은 인공적인 것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서울은 아주 오랜 기간 수도로서 기능해온 도시다. 그만큼 곳곳에 크고 작은 역사사건의 현장들이 산재해 있으며, 예술적 향취가 그윽한 공간이 숨어 있고, 다른 누구보다 특별한 삶을 살다간 이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는 동안의 흔적들은 이 100여 년의 시대를 다른 어느 시대보다 더욱 오롯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더욱이 이런 장소들은 그저 어제의 공간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좋든 싫든 이 시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나, 또 앞으로 한국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곳들이 적지 않다."  -권기봉의 도시산책, 서울의 일상. 그리고 역사를 걷다

     

    서울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옛것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서울의 낯선 장소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무수한 단어와 이야기가 내게 말을 걸었는데, 다시는 이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아련해지던 기억...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나쳐 버렸던 옛 흔적들도 아쉽다. 새로운 것들이 아무리 근사해도 오랫동안 축적된 시간의 흔적을 대체할 수는 없기에 재생과 보존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낡고 오래된 것들에게 보다 따뜻한 시선을 주어야겠다. 그리고 그 장소들이 서울이라는 삶의 터전에서만 볼 수 있는 뿌리 깊은 문화로 이어지기를. 서울의 오래된 장소는 꽤 낭만적이다.

     

    # Reference 

    약현성당- www.yakhyeon.or.kr

    염천교 수제화거리- yeomcheonshoes.co.kr

    문화역 서울 284- www.seoul284.org

    열정도- www.facebook.com/thepassionisland

      

     

     

    한유림

    비주얼머천다이저. 쇼윈도에 빠져 런던으로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피아졸라/마추픽추/우디 앨런 www.udimiblo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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