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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삿포로, 여기가 눈의 세상이야

    몬순 몬순 2019.04.03

    카테고리

    일본, 홋카이도

    "여기가 눈의 세상이야"

    문득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 그날 밤을 기억해본다. 그날 역시 나와 친구들은 지루한 일상과 잡히지 않는 꿈, 그 사이의 짠 내 나는 휴가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한 번도 해외여행 경험이 없던 친구 B가 “이번 겨울에 눈 구경도 제대로 못 했는데, 눈 많이 내리는 데가 어디냐”라고 물었다.

    그때 맨 먼저 나의 뇌리를 스치는 곳이 홋카이도였다. 천천히 그러나 여과 없이 쏟아지는 하얀 눈, 깊은 산속까지 침투한 얼어붙은 시간과 적막하지만 낭만적인 눈의 도시. 제법 괜찮은 이미지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그 후의 일은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우리는 그날 가장 저렴한 삿포로행 티켓(물론 서로의 회사 일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을 찾았고, 며칠 뒤 3개월 할부로 결제까지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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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눈동자에 건배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두 명의 친구(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F와 해외여행이 처음인 B)와 함께 신치토세 공항에서 삿포로역으로 가는 JR에 몸을 실었다. 해는 이미 넘어간 저녁 시간이었지만 역, 마을 어귀, 큰 도로 어디서든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등불처럼 비추고 있었다. 문득 바라본 차창 너머로 듬성듬성 눈이 보이더니 이내 날카로운 눈발이 우리가 탄 열차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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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가 눈이 나라인가요?”

    우리나라 면적의 약 80% 크기인 홋카이도는 일본 본토인 혼슈에 이어 2번째로 큰 섬이다. 홋카이도는 겨울이 되면 오호츠크해의 영향을 받아 많은 양의 눈을 땅에 뿌려댄다. 삿포로 기준으로 평년 10월 말부터 첫눈이 내리고 때때로 4월까지 내리기도 한다니, 이들이 살아가야 할 겨울은 너무도 길다. 조금은 막막한 순백의 시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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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역에 도착해 땅을 밟자 ‘뽀드득’ 소리와 함께 겨울의 땅에 온 것이 실감 났다. 우리는 천천히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전날 눈이 많이 내렸었고, 도시의 네온사인은 흰 눈에 반사되어 무채색의 도시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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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역 주변에서 뜨끈한 라멘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친 우리는 숙소로 들어가 짐을 던진 뒤, 스스키노 거리로 나왔다. 금요일 밤의 스스키노는 수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니카상’. ‘글리코상’이 오사카 도톤보리를 상징하듯 니카상은 삿포로 스스키노를 대표하는 존재다. 니카상은 왼손에 위스키의 주원료인 보리를 쥐고, 스윗하게 위스키를 건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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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은 수상한 그의 정체에 대해선 타케츠루 마사타카라는 한 위스키 덕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920년,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에서 유학을 마친 그는 스코틀랜드인 아내 리타와 함께 고국인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 스코틀랜드와 자연환경이 유사한 지역을 찾다가 오타루 인근 요이치에 증류소를 세웠다. 

    이렇게 시작된 재패니즈 위스키는 스카치위스키와 유사하면서도 독특한 맛 때문에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됐다. 여담으로 타케츠루 마사타카와 리타의 러브스토리는 NHK에서 <맛상>이라는 아침 드라마로 제작돼 비교적 최근까지도 일본에서 위스키 붐을 일으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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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이거... 만들라는 술은 안 만들고 사랑만 만들었군요. 그렇다면 당신들의 큰 뜻을 저버릴 순 없죠."

    그렇게 우린 밤늦게까지 스스키노를 활보하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술과 안주를 샀다. 삿포로에서의 첫날밤은 알콜로 다져진 깊은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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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편지는 왜 하필 오타루에 도착했을까

    어쩌면 나의 홋카이도 앓이는 여기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 진심이 담긴 편지 한 통(사실은 여러 번의 편지가 오가긴 했지만)이면 그 어떤 마음도 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 영화 <러브레터>, 오타루는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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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예쁜 마다마을 풍경을 지나면 곧 오타루에 도착한다.

    다음날 신선하고 찬 공기로 숙취를 끝낸 우리는 삿포로역에서 JR을 타고 오타루로 향했다. 오타루 역까지의 거리는 약 40분,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겨울바다를 보고 있으면, 어느덧 소소한 항구 마을에 닿는다.

    DSC02273_84280573.jpg오타루역, 포근한 아침 햇살에 전날 쌓였던 눈이 녹아버렸다.

    기차에서 내린 후 우리는 먼저 운하로 향했다. 지금이야 삿포로의 위성도시인 오타루이지만 홋카이도 개척이 시작되던 19세기 후반에는 하코다테에 이어 홋카이도 제2의 도시였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약 1.1km의 운하는 그 시절 오타루가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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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하 양옆으로 난 오래된 창고들은 현재 레스토랑과 펍, 기념품 숍 등으로 변해 관광객들의 포토존이 되었다. 창고들은 각각 색다른 느낌으로 리모델링 되었으니 한 곳씩 들어가 내부를 구경하는 것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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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루 운하에서 오르골당으로 가는 길에는 ‘사카이마치도리’라는 상점 거리가 있다. 약 1km 가까운 이길 위에는 수많은 음식점과 카페, 기념품 가게가 들어서 있다. 부드러운 치즈케이크로 유명한 르타오의 본점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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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홋카이도는 낙농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유제품의 품질이 무척 뛰어나다. 그래서 디저트 카페도 굉장히 많고 어느 곳을 가도 괜찮은 음식을 맛볼 수 있다.

    KakaoTalk_20190331_055930930_46498953.jpg르타오 본점의 케이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남자 셋이 염치도 없게 귀엽고 달콤한 케이크를 흡입했다. 

    INFO. 르 타오 본점                                        
    · 주         소: 7-1 6 Sakaimachi, Otaru, Hokkaido
    · 영업 시간: 09:00~18:00

     

    달콤한 카페 투어를 마치고, 메르헨 교차로 옆 오르골당 본관을 찾았다. 오타루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오르골당 내부는 생각보다 좁았다. 건물 자체가 작았다기보다 수용 가능한 인원을 한참 넘을 정도로 관광객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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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신발에 묻혀온 눈발이 흩날렸다. 혼잡한 입구를 지나자, 안쪽에는 작고 귀여운 오르골들이 노래를 뽐내고 있었다. 1층에는 부담 없는 선물로 좋은 작은 오르골들이 있었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값비싼 오르골들이 모여 있었다. 한편에는 오르골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대형 디오라마 오르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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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FO. 오타루 오르골당                                        
    · 주         소:
    4-4-1 住吉町 Otaru, Hokkaido
    · 영업 시간: 09:00 ~ 18:00

     

    선물용으로 고른 오르골 몇 개를 사고 밖으로 나오자 금세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날씨도 예측불허이긴 마찬가지, 진눈깨비에서 시작한 눈발이 서서히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눈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미나미오타루역에서 다시 삿포로역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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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삿포로 역으로 돌아갈 시간,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완전한 밤이다. 


    삿포로의 역사는 맥주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거의 술을 마시지 못한다. 그럼에도 누군가 홋카이도에 간다면 삿포로 맥주 박물관은 꼭 방문하기를 권할 것이다. 그 이유는 삿포로 하면 삿포로 맥주가 먼저 떠오르고, 아주 자연스럽게도 멋진 맥주 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삿포로 맥주 박물관은 삿포로역에서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있다. 택시를 타면 10분 내외로 도착하지만,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거리를 느지막이 걷는 것도 좋다. 때문에 아직 체력이 남아있는 여행자라면 걸어가는 편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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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부터 맥주 냄새가 나는 느낌적인 느낌.

    붉은 벽돌의  삿포로 맥주 박물관은 구청사와 함께 삿포로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특히 늦은 밤 조명이 켜진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박물관 견학은 입장료 없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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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부로 들어서면 먼저 맥주를 제조하는 초대형 가마가 눈에 띈다. 엄청나게 큰 가마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삿포로 맥주의 역사를 설명해 놓은 전시공간이 나온다. 시대별 맥주병 디자인과 포스터, 공정 과정을 모두 살펴볼 수 있으니 맥주 마니아라면 꼭 둘러보자.

    DSC02479_95501407.jpg리미엄 투어(500엔, 사전 예약)를 신청하면, 박물관 견학 시 큐레이션 서비스와 함께 맥주의 스노우 헤드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맥주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직접 맥주를 마시는 것, 1층의 레드홀에는 신선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테이스팅 라운지가 있다. 여기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삿포로 블랙라벨, 삿포로 클래식, 삿포로 카이타쿠시(개척사 맥주) 3종을 모두 마실 수 있는 테이스팅 세트(600엔)다.

    마침 3명이었던 우리 일행은 큰 고민 없이 테이스팅 세트를 주문했다. 그리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홀에서 맥주 한잔씩을 들고 건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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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을 못 마신다고 했지 안 마신다고는 안 했다. 

    “짠!”

    마침 창밖에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눈이 그쳤고, 맥주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는 진부한 건배사마저도 알딸딸한 술기운에 무르익는 밤이었다.

    INFO. 삿포로 맥주 박물관                                   
    · 주         소:  
    9 Chome-1-1 Kita 7 Johigashi, Sapporo, Hokkaido
    · 영업 시간: 11:00 ~ 20:00(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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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순

    두루두루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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