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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황 냄새가 이토록 좋아질 수 있다면

    몬순 몬순 2018.11.06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노천탕에 몸을 맡기는 일.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머릿속의 모든 잡념도 함께 증발할 것만 같았다.
    특히, 요즘처럼 쌀쌀해지는 계절이라면 더욱.

     


     

    온천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마을


    어느 때보다 바쁘고 더웠던 여름이었다.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을 넘어 절박함이 될 즈음, 덜컥 가을의 오이타 왕복 티켓을 결제했다. 우리가 온천으로 유명한 이 작은 고장으로 떠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서울~부산 왕복 KTX 푯값보다 저렴한 특가 항공권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꽃양은 온천의 고장, 온양 출신이다. 그녀가 말하길 "유년시절, 주말마다 의무적으로 다녔던 동네 목욕탕마저 온천수가 펄펄 끓고 노천탕이 있었노라"라고 했다. 이런 그녀도 '겨우 온천을 즐기러 가는 여행'에 꽤 흥미가 있었는지, 온천수의 효능(특히 피부미용)에 대해 끝없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반면 목욕 후 마시는 초코우유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억지로 목욕탕에 끌려다녔던 나는 온천 자체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가을은 왔고, 우리는 유후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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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후인역 앞의 풍경

    유후인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우리나라 여행자들은 후쿠오카 공항을 통해 버스나 기차를 타고 넘어간다. 그러나 오이타 공항을 이용하면 훨씬 더 빠르고 편리하게 유후인에 갈 수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오이타 공항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5분, 영화 한 편을 보기에도 조금 어렵다. 그러나 영화보다 잠을 택한다면 잠깐 눈을 붙이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오이타 공항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을 달리면 유후인에 도착한다. 창문 밖으로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 시간도 그리 지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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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후인은 풍부하고 질 좋은 용출량으로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온천마을이다. 그러나 이곳이 온천마을로 유명해진 건 한 세기가 채 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천황이 며칠간 머물며 온천을 즐겼다던가, 물로 불치병을 치료한 이야기는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약 2만여 명이 사는 이 작은 마을이 유명한 온천 관광지가 된 건 1970년대부터다. 지역의 주민들은 건물의 크기와 높이를 제한하고, 해외 호텔을 들여오지 않고 단체 관광객을 받지 않는 등 주변의 커다란 온천 도시와 차별화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그러니 유후인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거창한 마음은 접어두자. 이 마을에서는 그저 따뜻한 노천탕에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온천에서 즐기는 휴식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지켜온 일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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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린 길에서 만난 풍경


    유후인을 여행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역 앞에 난 큰길을 따라가면 그만이다. 유후인 역에서 긴린코 호수 방향으로 쭉 뻗어있는 유노츠보 거리가 이 도시의 중심이다. 출발점인 역부터 종착지인 긴린코호수 까지의 거리는 약 1.7km, 천천히 구경하면서 걸어가도 30분 남짓한 거리다. 그러나 유노츠보 거리는 늘 사람으로 북적이기 때문에 짐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다행히 정류장에 캐리어가 넉넉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코인 라커룸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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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노츠보 거리에는 '토토로'와 '헬로키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캐릭터 숍이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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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차 한 대 정도 다닐 너비의 도로 사이로 아기자기한 가게와 음식점이 많이 보였다. 유후인에는 여전히 메이지 시대의 서양식 가옥이 들어서 있고, 유서 깊은 가게들도 많다. 나는 세월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별 의심 없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고,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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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여운 유후인 맛집 스누피차야. 밥맛은 조금 짠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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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12가지의 녹차 맛 젤라또를 판매하는 텔라토. 잘 모르겠으면 이 가게의 'BEST1'을 고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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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딩과 치즈케이크가 유명한 미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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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후인 유노츠보 거리에 있는 카페 쿠쿠치. ‘지산지소’를 콘셉트로 지역에서 난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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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노츠보 거리의 길거리 음식도 훌륭한 선택이다. 가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군밤을 택했다

    이 거리 어디서든 고개를 돌리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유후다케(1,584m)가 보인다. 유후인의 상징처럼 높이 솟은 이 활화산은 나무가 별로 없어 제법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멀리 솟은 유후다케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면 긴린코(金鱗湖) 호수가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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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노츠보 거리 끝자락에 있는 긴린코는 유후인을 대표하는 관광지다. 이 호수의 특징은 담수와 온천수와 함께 솟아오르는 것이다. 때문에, 가을이나 겨울철 기온이 많이 내려간 아침에는 안개가 호수 위에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우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막 점심때가 지난 일요일 오후였기 때문에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아마 유후인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 자그마한 호수를 빙 둘러서고 있는 듯했다. 결국, 기념사진을 남길 틈도 없이 잠깐 눈에만 담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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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유후인에 왔으니 온천을 체험할 수 있는 료칸에서 묵고 싶어졌다. 그중 가격과 위치 등을 고려해 유후인 역 남쪽에 있는 후키노야(冨季の舎) 료칸을 택했다.

    놓쳤던 풍경들을 되새기며, 시골길을 따라 약 15분 정도 걸어 후키노야 료칸에 도착했다. 안내서에 의하면 이곳은 '다이쇼 시대의 정경'을 콘셉트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오래된 여관의 모습에서 짐작한 건데, 다이쇼 시대의 풍경이란 나무 냄새가 많이 나고, 집마다 작은 정원이 있으며, 밤에는 노천탕에서 하루의 피로를 푸는 모습일 것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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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한 안주인의 설명(이곳에는 남탕, 여탕 그리고 총 3개의 가족탕이 준비돼있다)을 듣고 방으로 들어온 우리는 조금 낮잠을 잔 뒤, 식사하러 밖으로 다시 나섰다.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인데 금세 밖이 어두워지더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 시간은 유후인을 즐기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온천이 만들어 낸 수증기가 지붕과 골목 사이를 슬금슬금 기어 나오다, 산을 휘감은 안개와 뒤섞여버린다. 그러면 마을 곳곳에서 온천에서 내뿜는 유황 냄새가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유노츠보 거리의 음식점들은 보통 오후 5~6시 사이에 영업을 종료하기 때문에 온갖 음식 냄새가 사라진 텅 빈 거리에는 유황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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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는 푸짐한 저녁 식사를 기대한 외지인에게 가혹한 현실이기도 하다. 결국,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한 채 편의점 봉지를 꽉꽉 채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편의점 음식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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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점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퍽퍽했을 것이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그토록 고대하던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생각보다 좋은데?"

    따뜻한 물(사실은 뜨거운 물이었을 거다)이 온몸을 휘감으면서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온천 경험이 없던 나는 물론, 온천에 해박한 꽃양도 그저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물의 온도에 집중했다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증기도 밤의 어둠에 자취를 감췄다. 다만 이따금 콧속에 전해지는 진한 유황 냄새만이 이곳이 온천탕임을 상기시켜 줬다.

    적막한 탕 안엔 기쁨의 한숨 소리가 나돌았을 뿐, 너무나도 고요해 별도 달도 숨어버렸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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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순

    두루두루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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