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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턴구리 엄턴구리 201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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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에피소드

     

    싸늘했던 나의 다질링, 나흘간의 기억 

    홍차와 휴양의 도시, 인도 다질링 Darjeeling

     

    웨스트 벵갈주의 북쪽에 위치한 다질링은 동명의 홍차로도 유명한 인도의 대표적인 산간휴양지다. 해발 2248m의 히말라야 산속에 위치하여 한여름에도 시원한 기운을 느낄 수 있으며 특히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칸첸중가의 광활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원래는 시킴 왕국의 소유였으나 18세기 말 소유권을 이양 받은 영국이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위한 휴양지로 개발하였다.

    고원의 서늘한 기후를 활용한 차 재배지로도 활용하였으며 유럽에서도 유일하게 차를 즐겼던 영국인의 취향에 다질링 홍차는 현재까지도 그 명성이 그대로 전해진다. 인도의 살인적인 더위를 피해 이곳 다질링에서 고원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홍차 한잔 음미하는 것도 인도를 여행하는 별미라 하겠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을 보다

    오스트리아 산악인 하인리히는 히말라야의 최고봉 중의 하나인 낭가 빠르바트로 원정을 떠난다. 하지만 자연은 쉽사리 그를 허락지 않았다. 급변한 세계정세(2차 세계대전 발발)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다 구사일생으로 당도한 곳은 ‘라사’라는 금단의 도시, 낯선 땅 티베트의 이방인이 된 하인리히는 그곳에서 티베트의 종교적, 영적 지도자인 13세의 어린 ‘달라이 라마’를 만난다. 그리고 그와 나이와 신분을 뛰어 넘는 우정을 나누는데... 그로부터 7년, 정치적 격변기에 놓인 티베트의 가혹한 운명 앞에 하인리히가 느꼈을 말 못할 감정들이 어찌 안타까움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이 될까?

    검은머리에 검은 눈, 외꺼풀의 날카로운 눈매와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흡사 우리네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을 보며 티 없이 맑고 깨끗하게 살아온 그들을 규정짓는 단어가 고작 ‘난민’이라는 것이 이토록 부당하고 억울할 수가 없으니 1959년, 달라이 라마와 함께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난민들의 자치기구인 [티베탄 난민 센터]가 있는 이곳 다질링을 방문하는 발걸음이 절로 숙연해 지는 까닭이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인도 북서부 다람살라(맥그로드간즈)에 있다.

     

     

    다질링 가는 길

     

    이동1

     

    콜카타 하우라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몇 번의 연착을 거듭한 끝에 아침 열시가 넘어서야 다질링의 관문인 뉴 잘페구리역에 도착한다. 인도 기차, 특히 SL칸의 악명을 익히 들어 단단히 각오를 한 탓 일까 생각보다 깨끗한 기차 내부에 한결 마음이 놓인다.

    콜카타에서 만난 한 친구는 기차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며 소지품을 주의할 것을 신신당부했고 또 어떤 이는 성추행을 당할 수도 있다면서 겁을 잔뜩 주었는데 내가 탄  다질링행 SL한켠엔 한 인도인 대가족이 호기심 어린 눈길만 넘쳐났다. 

     

     

    이동2

     

    시킴주에 산다는 그 가족은 할머니를 시작으로 어린 손자까지, 그 수가 무려 아홉이었는데 선점한 베드는 달랑 6개뿐이었다. 연휴라서 표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며 불만을 비치면 외국인이라 비교적 쉽게 표를 구한 나는(인도에는 여행객을 위한 외국인 쿼터제도가 있다) “여행 다녀 온 거야?” 재빨리 말 돌리기 급급하다.

     

     

    이동3

     

    뉴 잘페구리역에서 출발한 합승지프는 정원에 비해 과도하게 사람들을 구겨 넣는다. 3인용 뒷좌석에 덩치 큰 인도 아줌마들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꼴이라니! 간혹(실은 자주) 차가 비포장의 구덩이를 지날라치면 차체는 크게 요동을 친다. 재수 없으면(십에 팔구는) 천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기 일쑤이니 그 3시간의 여정에 꼬리뼈와 머리꼭지는 남아나질 않는다.

     

     

    이동4

      

    중간에 들린 휴게소에서 잠시 지친 엉덩이를 쉬어 간다. 길의 고됨에 절로 찌푸려진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때 한 아이의 아버지가 눈에 들어온다. 늦둥이를 본 것인지 아이 아버지라기엔 다소 나이가 있어 뵌다. 자신을 네팔리라 소개한 아비는 가는 내내 아이를 바라보는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다. 꼬리뼈가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도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는다. 아이는 꺄르르- 밝은 웃음으로 화답한다. 

     

     

    다질링의 짐꿑들

     

    3시간 여의 고행 끝에 다질링 시내 한복판에 지프가 멈춘다. 너머에 시계탑이 보이고 눈 앞으로는 끝도 없는 오르막이 이어진다. 그 오르막을 그는 아주 힘겹게 내딛는다. 커다란 등짐을 산처럼 짊어지고 행여나 질릴세라 오로지 땅만 보며 묵묵히 걸어간다. 머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짐짝의 무게가 더해져 고개는 뻐근히 저려오건만 먹고 살기 위한 발걸음을 사내는 멈출 수가 없다.

     

     

    서늘함을 넘어선 싸늘함에 기죽다.

     

    시장01

     

    밤새 기습한 추위는 서늘함을 넘어선 싸늘함이었다. 뼈 속 까지 전해오는 한기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다. 비어있는 옆자리는 콜카타에서 만난 동생의 사투를 대변한다. 겹겹이 쌓인 이불, 배탈까지 더해진 그 밤이 쉽게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짐작하는 마음에 동생을 찾아본다.

    식당으로 가면 나를 반기는 건 따끈한 미역국과 근 7개월 만에 처음 보는 사리곰탕 컵라면의 화끈한 비주얼이었다. 괴로운 밤을 보낸 동생이 갸륵하게도 손수 챙겨준 생일상이다. 지나가는 숙소 주인도 부러 멈춰 서선 생일축하 인사를 건네 온다. 내 생애 맞이하는 가장 초라한 생일상이지만 동시에 가장 특별한 생일상이 될 터이다.

    그 간 더운 나라만 돌아다녀선지 배낭을 뒤져봐도 보온이 될 만한 게 없다. 다질링만 벗어나면 될 테지만 당장의 추위는 내일을 생각하긴 너무나 버거웠다. 단단한 차림새를 위해 초우라 광장을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선다.

     

     

    숙소주변05

      

    숙소를 나가자 마주친 동네 아이, 그 모습이 꼭 우리네 아이들과 같다. 콜카타에서 만난 인도인이 다질링에 간다하니 그곳에 가면 나와 같은 외모의 사람들이 많을 거라더니 그 말이 맞다. 네팔과 맞닿고 티베트 난민이 사는 그 곳은 우리네 모습과 흡사한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시장02

      

    ‘워워-’ 시장초입에 발을 들어서기 무섭게 어서 빨리 비키라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얼결에 비켜 노니 등짐을 가득 멘 지게꾼이 빠르게 스친다. 가다가 멈춰서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테니 속도를 늦추지 않는 것이 그들의 살 길이다.

     

     

    시장16

      

    여름을 건너 겨울로 왔다. 모두의 몸에는 두꺼운 겨울옷이 걸쳐져 있었다. 파는 물건 족족이 털모자며 털장갑, 털 스웨터 일색이다. 그저 조금 북쪽으로 올라왔을 뿐인데 풍경은 낯설고 호기심은 증폭된다. 인도의 휴일, 귀한 겨울을 만끽하러 온 사람들은 저마다 맘에 드는 물건을 집어 들고 제 몸에 가져간다. 여기저기 알 수 없는 힌디 말이 오가면 시장은 매한가지로 시끌벅적하다. 나도 마침 눈에 띄는 물건 하나가 있는지라 그들의 흥정에 귀 기울인다.

     

     

    초우라광장주변03

      

    초우라(초우라스타) 광장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분주했다. 다질링의 랜드 마크다운 북적함이다. 말고삐를 쥐고 있는 아이는 기껏해야 열 네, 다섯쯤 돼 보인다. 소년들은 지나가는 사람들 일일이 붙잡고서 서로 제 말이 최고라며 영업전선이 활발하다. 비대한 인도 부자가 말 위에 올라탄다. 비실한 말굽이 또각또각 소리를 낸다. 관광객을 태운 말은 초우라 광장을 몇 바퀴 돌고서는 처음에서 멈춰 선다. 인도 부자는 제법 빳빳한 지폐를 소년에게 건넨다. 아이들은 말이라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 곁을 떠나지 못한다. 한국이나 인도나 아이들의 눈에 말은 매한가지로 신기한 동물인가 보다.

     

     

    초우라광장주변01

      

    북쪽 산책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 본다. 날씨가 흐린 탓에 칸첸중가의 절경은 볼 수 없을 테지만 안개에 쌓인 그 모습도 나름 운치가 있다. 

     

     

    걸어도 걸어도...

     

    스티물레이팅카페12

     

    사실로 말 할 것 같으면 날이 안 좋아 타이거 힐을 패스했다는 건 어딘지 핑계에 불과하다.
    실상은 몸이 좀 안 좋았다. 하여 몸의 지시에 순응하며 그저 천천히 걸어보기로 한다.

     

     

    스티물레이팅카페11

      

    우선은 떠날 준비부터 하고자 했다. 다질링 기차역에서 인내를 갖고 기다린 끝에 순서가 돌아왔지만 티켓이 없다는 허망한 대답만을 듣는다. 터벅터벅 걸음을 되돌린다. 내일은 무작정 합승지프를 타고 뉴잘페구리로 가봐야겠다. 그곳에 가면 뭔가 해결책이 나오리라는 대책 없는 믿음도 생긴다. 다질링에 온 지도 어느덧 나흘이 되어간다.

    딱히 어떤 목적지를 둔 것은 아니었다. 길이 가는 대로 무작정 걸어본다. 한참을 걸다보니 [동물원] 초입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스티물레이팅카페06

      

    군것질 거리며 장신구를 파는 노점이 듬성듬성 자리한다. 먹거리를 파는 청년은 맛이나 한 번 보라며 달라는 소리도 않았는데 정체불명 그것들을 막 섞기 시작한다. 당황해서 손사래를 쳐도 소용없다. 거칠 것 없는 손길은 마지막 소스를 흩뿌린다. 예상치 못한 강매를 당하는 순간 섣부른 반항은 소용없다. 종이 고깔 속의 음식은 양파 맛이 강하게 전해 오는 것이 내 입에는 별로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맛있다며 이어진 줄이 한참이다.

     

     

    스티물레이팅카페13

      

    [스티물레이팅 카페], 히피풍의 이곳은 티베트 음식인 모모(우리네 만두와 같다.)를 전문으로 한다.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에 짜이나 한잔 마실까 들어온다. 얼어붙은 몸도 좀 녹이고 허한 배도 좀 채워야겠다. 카페 구석에서 모모를 빚는 아주머니는 주문을 하자 밀가루 범벅의 손을 탈탈 턴다. 빚고 있던 모모를 몇 개 집어 즉석에서 찌거나 튀겨주는데 티베트식 만두인 모모는 우리의 입맛에도 그만이다. 짜이와 모모에 취해 그 뒤로 몇 번을 더 찾아간다. 갈 때마다 변함없는 맛이다.

     

     

    다질링 산 속에 자리 잡은 티베탄 난민 센터

     

    티벳난민센터04

     

    캄보디아 프놈펜의 뚜얼슬랭 박물관은 그것이 그 자체로 분노였다면 다질링 산 속에 자리 잡은 [티베탄 난민 센터], 그것은 그 자체로 슬픔이었다. [티벳에서의 7년], 영화 속 티벳인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사람들이 부락을 이루며 그들의 삶을 연명하고 있다.

     

     

    티벳난민센터05

      

    1959년, 달라이 라마와 함께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난민들이 다질링의 자그마한 터전을 발판삼아 그들의 정신을 지켜나간다. 그네들의 힘겨운 저항이 어서 빨리 독립으로 끝맺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지금의 국제 정세는 그들에게 너무도 억울하기만 하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며 그들을 응원하고 싶은 것은 같은 아픔을 지닌 우리의 진심이다.

     

     

    티벳난민센터07

      

    그네들은 선천적으로 싸움을 할 줄 모른다. 지독한 종교적인 삶이 골수에 박혀 천성이 그러하다. 그래서 투쟁의 역사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다. 나는 나라를 잃어본 역사를 가지고는 있지만 또 실상 경험은 없기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나라를 잃는 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억장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티벳난민센터08

      

    "2016년 티베트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2009년 인도의 위대한 요기 '라히리 마하사야(Lahiri Mahasay)‘의 환생이라는 8살 난 인도소녀는 달라이라마를 만나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종말론 따위 콧방귀로 날려버린 나였지만 왠지 이번만큼은 간절함을 보태본다. 모든 고통이 지나고 티베트에도 하루 빨리 자유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자립을 응원하며 몇 가지 기념품을 사들고 난민센터를 내려온다.

    하늘은 맑고 여학생들의 웃음은 수줍기만 한데 뭣 모르는 아이의 눈망울은 그저 멀뚱멀뚱하다.

     

     

    케벤터즈01

      

    다시 마을로 회기했다. 요기나 할 겸 들어간 [카펜터즈]의 음식은 생각보다 형편없었지만 분위기만은 어느 곳이 부럽지 않았다. 멀리 뉘엿뉘엿 해는 저물고 이제 그만 다질링의 낭만도 접어본다. 여전히 다음을 향한 표는 손에 쥐지 못하였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대책 없는 무작정으로 내일을 기다린다.

     

     

     

     

    엄턴구리

    용의 머리가 되고 싶은 뱀의 꼬리로 ‘잡다함’이 지나쳐 자칫 ‘너저분함’으로 치닫는다. 미대를 졸업해 그림을 그리며 교양 있게 살줄 알았는데 생뚱맞게 연극과 영화미술에 빠진 탓에 한 몇 년을 작살나게 고생만 했다. 그러다 운 좋게 환경디자인 회사에 취직을 하지만 그저 좀 ‘무료’하단 이유로 지복을 날로 차고, 지금까지 몇 년 째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며 되도 않는 글들을 끼적이고 있다. 밥먹고 사는 일은 자유로운 기고로 이어진다. 문화 예술 칼럼을 비롯해 다양한 취재 원고를 소화하고 있다. 한 번의 긴 여행과 몇 번의 짧은 여행을 무한 반복 중이다. 덕분에 적당히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견문은 넓혀진 것도 또 아닌 것도 같다. 쉽게 마음이 동하는 갈대 같은 호기심에 뿌리 깊은 나태함이 더해져 도대체가 갈피를 못 잡는다. 여행과 생각, 사람과 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blog.naver.com/waste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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