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스의 하얀집 그리고 파란문
영화 <아주르와 아스마루> 속 바로 그 곳이야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했다. 어디 가서 불어한다고 말하기 창피한 수준인데 그래도 ‘나 불어한다’고 꼬박꼬박 어필하고 다닌다.
전필이 어려워 어떻게든 학점을 따려고 선택과목으로 프랑스어권 문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프랑코포니(불어권) 영화를 굉장히 자주 다뤄 매 수업이 즐거웠었다. 그중 <아주르와 아스마르>라는 미셸 오슬로 감독의 영화는 아랍문화권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미셸 오슬로 감독은 내 인생 첫 프랑스 영화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감독으로 나에게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알게 해 준 분이다. 2000년도에 국내에서 개봉한 프랑스 그림자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2D인 데다가 흑백에 가까운 그림자 애니메이션이었음에도 10살 어린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마 이때부터 프랑스어와 문화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7, 8월 튀니스의 날씨는 무더운 여름이므로 4월에 챙겼던 슈트케이스를 그대로 가져가면 완벽하다.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 전통시장 souk로 향했다. 적도에 가까울수록 구름이 낮게 뜨는 걸까? 손에 닿을 듯한 구름이 머리 위 파란 하늘 속에 동동 떠있었다. 약간은 쌀쌀하지만 춥다고 웅크릴 정도는 아니었다. 10분 정도 달렸을까?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전통시장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너희 옷 사려고 그러지? 여기가 완전 오피셜한 곳이야.
다른 곳은 다 메이드 인 타일랜드나 차이나라서 질이 안 좋아."
아, 이게 말로만 듣던 택시 기사와 상점가 간의 안 보이는 거래와 커미션의 현장인 건가.
변태 기질이 다분한 나는 말로만 듣던 상황을 접하자 갑자기 신이 났다.
"우리는 옷 사려는 게 아니라 튀니스 문화를 보고 싶어. 그래서 전통시장 souk에 가려는 거야."
"거기는 완전 다운타운이야. 여기서 한 30분 걸리는걸. 그리고 여기가 질이 더 좋은데?""옷은 필요 없고 그냥 마켓에 가고 싶은 거야. 거기로 가자."
"그럼 100TDN(튀니지안디날)에 시장까지 가고 다시 여기로 오는 거까지! 어때?'"
나이 들면서 늘어나는 건 능청스러움이다. 자, 흥정을 시작해 볼까?
"내 친구가 튀니지 앤 데 튀니지 택시 되게 싸다고 그랬어. 내가 구글링해도 10TDN 이면 어디든 간다던데 그니까 60TDN 하루 대절하자."
"안돼! 시내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시디 부 사이드(Sidi Bou Said)까지 와서 너희 기다렸다가 호텔까지 데려다주는 건데? 90!"
"니 내 튀니지안 친구가 말이야 (어쩌고 저쩌고). 우리 사실 환전도 안 했어 그러니까 70!"
"90!"
"그럼 80! 할라스(Halas)"
"그래 할라스! 80"
*할라스(Halas): 끝!(done)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결정을 내릴 때 아니, 말 끝마다 붙인다.
영어와 불어를 섞어가며 어찌어찌 80TDN으로 낙찰! 깎았음에도 속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바로 시내로 향했다. 신기할 정도로 잘 닦인 깨끗한 도로, 정확한 신호체계와 바다 한가운데를 가르는 4차선 도로. 양옆으로 무역선이 대기 중인 신기한 곳. 정말 모든 게 신기했다.
흔히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국가들을 전부 아프리카로 통칭해서 부르곤 한다. 문화도 종교도 기후도 다 무시해버리고 다 비슷비슷하겠거니 자의적으로 생각해버린다. 나는 아니라고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짐 챙긴 걸 보면 괜히 잰척했었던 것 같다.
20분 정도 달려서 시내에 들어갔다. 과거 프랑스령이었던 곳이라 유럽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알고 보니 거리 이름이 샹젤리제 거리란다. 로터리 한가운데 자리 잡은 빅벤과 때때로 지나가는 초록색 트램. 길거리에 늘어선 꽃 파는 마차를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나오는 바르셀로나 광장. 작은 유럽이 여기 있었다.
:: 아랍문화권의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는 각종 작품들. 파란 문을 열면 거울이 나온다.
전통시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 30분이면 둘러본다. 다만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어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딱히 뭘 산다기보다 화려한 색깔과 특이한 모양의 장신구 등을 구경하러 가기 좋은 곳이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튀니스 문화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결혼을 안 했다면 제 아들을 싼값에 데려가라며 자석 가게 아저씨가 쿨하게 제안했다. 바로 옆 가게를 운영하는 게 자기 아들이란다. 맞은편 역시 본인의 가게! 가족 경영인가 봐.
느긋한 모드로 바뀌어 광장에 앉아있어도 카페에 가도 혹은 계속 산책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Souk에서 벗어나 샹젤리제 거리 초입에 있는 작은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라떼를 마시고 싶어 café crème을 주문했다. 부드러운 크림이 두껍게 올라간 진한 커피! 2.40TDN으로 1디날에 약 500원인 걸 감안하면 1300원 정도 하는 굉장히 저렴한 가격이다.
길거리에서 마시는 카페라떼. 코코아 파우더가 올라간 부드러운 크림층을 수저로 야금야금 퍼먹다가 이내 커피와 함께 마셔봤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crème은 설탕이 안 들어갔음에도 달게만 느껴진다.
:: 튀니스 전통 도넛으로 바삭하게 튀긴 반죽에 설탕을 듬뿍 발라 준다.
길거리에 팔자 좋게 늘어져있는 고양이처럼 한동안 멍하니 햇살을 쪼이며 카페에 앉아 있었다. 활기 넘치면서도 여유로운 튀니스는 내 상상 속 튀니스와 전혀 달라 당황스러우면서도 뜻밖의 행운을 얻은 것처럼 행복했다.
시디 부 사이드 (sidi bou said)
어디서 찍든 인생사진
내 인생은 하나의 움직이는 축제에요.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걸 글로 옮겨요. brunch.co.kr/@avecrh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