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우연히 마주친 신사의 겨울밤
구시다 신사
여행, 우연이 주는 즐거움
겨울 여행은 아쉽기 그지 없다.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 짧은 하루란 그렇지 않아도 달갑지 않은 녀석인데, 겨울 여행은 제 아무리 부지런하려고 애를 써도, 일찍 찾아오는 밤 때문에 더욱 짧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후쿠오카를 찾은 그 날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0도 없이 벌써 찾아온 밤이 야속했다. 하릴없이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가야 하는 여행자의 발걸음이 무겁고도 무거울 수 밖에.
텐진에서 탄 버스는 하카타로 향했다. 하루종일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은 몸은, 버스 안의 따뜻한 온기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먼저 노곤해지기 시작한다. 바깥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은지 오래, 꾸벅꾸벅 하고 앉았는 이 저질 체력이여.
잠깐 졸다 눈을 떴다. 익숙하지 않은 창 밖 풍경에 깜짝 놀라 바로 버스에서 내려 버렸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 턱이 없었다. 어렴풋이 들은 차내 방송과 이정표의 방향들과 손에 들고 있는 (거의 무용지물의) 지도를 조합하여 내 위치를 판독해 내려 용을 써 본다. 그러나 이내 포기! 걸어보자. 어차피 걷기 위해 떠나온 여행이 아니던가.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이 주는 불안함은 잊고, 그 대신 설렘으로 걷는다. 그리고 밝게 빛나는 골목을 마주한다. 머리로는 그 방향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밝은 빛은 자꾸 길 잃은 여행자의 발을 이끈다. 도대체 여긴 어디인게야.
그리고 그렇게 마주한 신사의 밤. 여기는 후쿠오카의 구시다 신사였다.
그렇지 않아도 구시다 신사는 원래 찾아 오려고 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마지막 날 낮에 찾아 여유롭게 둘러보려 했었다. 헌데 어쩌랴. 이렇게 내 눈 앞에 서 있는데, 그저 만끽하는 것이 여행자의 옳은 태도일 터이니, 이미 까맣게 짙어진 하늘 빛을 깨닫고 얼른 걸음을 옮겨 구시다 신사의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아직은 푸른 빛이 남은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채도 높은 주황 빛의 도리이가 서 있다. 그 매력적인 조화. 이 때까지도 내가 선 곳이 '구시다 신사'인지도 몰랐다. 전각 바로 옆에 세워진 배치도의 -알아보기 쉽지는 않았던- 몇 개의 한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은 그저 우연히 마주한 이름 모를 신사였을 뿐이었다.
구시다 신사
주소 : 1-41, Kamikawabatamachi, Hakata Ward, Fukuoka, Japan
가는 법 : 후쿠오카 시영지하철 Gion 역 2번 출구로부터 남서쪽으로 도보 5분. 또는 하카타의 캐널시티로부터 걸어서 도착할 수 있다.
전화번호 : 92-291-2951
건축시기 : 757년. 헤이안 시대.
요약 : 헤이안 시대인 757년 건축된 신사로, 후쿠오카의 대표적 축제인 하카타기온야마가사마츠리의 오이야마가 출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구시다 신사를 마주했다. 원하지 않은 시각에,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하지만 그것은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날 나는 -원래의 계획대로 낮에 찾았더라면 마주하지 못했을- 밤의 고요함을, 똘똘똘 물 흐르는 소리를, 밤이기에 더 빛나던 신사의 색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신사의 뒷마당.
파란 하늘과 주황 빛 가로등이 발 길을 이끌었다. 사람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부스럭거리는 길냥이들만이 제 집처럼 이 곳을 드나들었다. 은근한 스산함에 조금 두렵기도 했으나 이내 마음은 평온해졌다. 그 평온해진 마음으로 신사의 밤,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물론 이내 쫓겨났다. 퍽 마음에 들었던 신사의 뒷마당은 사실 밤에는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 매력적인 하늘 빛과 인공의 조명 빛이 함께하는 이른 밤에 찾았기에, 잠깐이라도 그 마당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본전으로 향했다.
우연히 그 시간을 찾은 네 명의 여성. 그들은 담담하고 또 조금은 간절하게 그 곳을 찾아 그들의 하루를 정리했을 것이다. 좋은 일터와 내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 그런 소박한 소망들을 되뇌며, 여느 때 처럼 그들의 하루를 정리했을 것이다.
우리의 건축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지붕의 형태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분명 유려하고 또 매력적인 선들이긴 하지만, 나는 우리의 건축물이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딱 떨어지는 그 힘이 더 좋다.
시메나와. 그리고 시데.
저 거대한 밧줄은 우리네 금줄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허나 그 밧줄의 의미보다는, 저 거대한 짚 더미를 저리도 정갈하게 꼬아 놓은 그들의 솜씨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무엇 하나 비뚤어지지 않은 것이 그들의 장점이자 또 어찌 보면 단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의 소박한 소망.
정갈하게 써 내려간 글씨에 매력을 느껴 카메라를 들이대었으나, 몇몇 아는 한자들만 눈에 들어올 뿐이니 이방인인 나는 그저 무병하고 운수대통하기를 바라는 소망일 것이리라 그 의미를 가늠할 수 밖에 없었다. 의미야 무엇이었든, 누군가의 소박한 소망을 들여다 보는 것 또한 내 여행의 작은 즐거움.
원하지 않은 시각에,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마주했던 구시다 신사. 그랬기에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게 된 이 장소. 여행이라는 것이 마음 먹은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그래서 더 매력적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하카타의 이름 모를 골목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다. 똘똘똘 물 소리를 들으며.
이런 여행자에게 추천
밤의 신사를 경험해보고 싶은 여행자.
왁자지껄한 여행 보다는 조용히 생각하는 여행을 더 좋아하는 여행자.
길을 잃어도 당당할 수 있는 여행자.
신사의 밤은 그것의 낮보다 아름답다
여럿의 일본 여행을 하면서 많은 신사를 경험했다. 도쿄의 야스쿠니부터 여기 후쿠오카의 구시다까지. 야스쿠니를 찾는 정치인들의 행태야 곱게 볼래야 볼 수 없겠으나, 사실 대다수의 현지인들은 그들의 삶의 일부분으로,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 신사를 찾는다. 어떤 의도를 갖느냐에 따라 장소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는 법이다. 나에게 '신사'는 종교적인 의미보다 '공간'과 '건축'의 의미였다. 그런 나에게 구시다 신사는 '밤의 신사'라는 또 다른 표정을 보여준 공간이었다. 한낮의 신사와는 또 다른 고즈넉함과 고요함. 하루 일을 끝내고 정갈한 마음으로 하루를 정리하려는 그네들의 삶을 뒤쫓아 보고 싶다면, 밤의 신사를 찾아 보라. 신사의 밤은 그것의 낮보다 아름다우니.
건축이라는 것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의 경험으로 다시 건축을 하는 여행이 생활이고 생활이 여행인, 여행중독자입니다. http://blog.naver.com/ksn333111